얼마 전에 나의 일을 도와주던 비서가 해고됐었다. 사유는 잦은 지각과 조퇴였다. 비서는 먼 곳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었으며 돌보아야 할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해하고 넘어갔던 사항이었다.

그녀는 출퇴근 시간 때문에 근무시간이 단축되는 것을 보상하기 위하여 점심시간을 희생해가며 일을 했고 그래서 업무처리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서는 휴가를 떠나기 바로 전날 해고됐다.

이튿날이면 몇년 동안 계획해왔던 카리비아 해 크루즈를 떠난다며 좋아했는데 오후 5시께 인사담당자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고는 경비원에게 둘러싸여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인사 담당자는 비서에게 해고통지를 하면서 나를 찾아와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사전에 알려주지 못한 것에 대해 양해도 구했다. 사전에 이런 사실을 알려줄 경우에는 인사 결정에 다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담당 변호사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규칙이라고 했다. 일리있는 규칙이었다.

아마도 내가 비서의 해고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를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나미 떨어지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년간 같이 일하던 사람을 단 5분만에 보따리 싸서 내쫓을 수 있을까.

더욱더 나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주변 사람의 반응이었다. 해고된 사람이 안됐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규칙을 지키지 못한 비서가 실수한 것이라는 논조였다.

규칙을 지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사회생활에 예측 가능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칙만을 지킨다고 하여 최적의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항상 규칙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규정이기 때문이다. 해고된 비서처럼 조금 늦게 나오고 일찍 퇴근하는 대신 점심시간 동안 일을 함으로써 사무실에서는 비서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가정에서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그녀가 기여하는 효용이 증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규칙 위반으로 해고됐다.

10년 넘게 미국에 살다 보니 재미있는 속어를 배우게 된다. ‘Cover your ass’라는 말이 있다. ‘네 엉덩이부터 가리라’는 말이니 책임추궁을 당했을 때 최소한의 변명거리는 만들어 놓으라는 뜻인 것 같다.

일반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가장 좋은 변명거리는 바로 “나는 규칙대로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비하면 미국은 참으로 정나미 떨어질 정도로 원리원칙대로 사는 나라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말이다.

점심 시간이 되면 은행 창구에 아무리 많은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도 창구 문을 닫으며 “나는 정해진 만큼 일했으니 내 점심시간은 단 1분도 빼앗길 수 없다”며 나가는 직원이 바로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는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그들은 자신의 둔부를 감추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되 기회가 있을 때는 숨겨온 광기를 유감없이 분출한다. 미국에서 간간이 일어나는 LA사태와 같은 폭동이 바로 그런 예다.

한국 군대에서 “그 사람 FM이다”라고 하면 요령없고 융통성없는 사람을 비아냥거리는게 된다. FM이란 ‘Field Manual’의 약자다. 굳이 번역하자면 실전교범, 전투교범이라고나 할까. 교범대로 따르는 군대는 최소한의 전투력은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최고 정예부대가 될 수는 없다. 반면에 정예부대는 최소한 교범은 다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미국은 FM대로 하면 되는 나라다. 아니 적어도 우리나라에서처럼 조소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최소한 자신의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FM대로 따른다. 반면 우리나라는 ‘법없이도 살 사람’이 최고의 찬사다. 아직도 그 애틋한 정 때문에 많은 규칙에 예외가 생기고 있다. 하지만 법없이도 살 사람이 만든 군대가 자기 엉덩이나 가리려고 FM대로 사는 군대보다 오히려 최고 정예 부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어쨌거나 해고된 비서가 빨리 새 직장이나 구했으면 하고 계속 마음이 쓰이는 것을 보면서 된장찌개의 구수한 맛이 미국 직장사회에서도 퍼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박해찬 미HOWREY SIMON ARNOLD & WHITE 변호사 parkh@howrey,com

입력시간 2000/05/0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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