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피티, 젊은이들의 힙합 문화

낙서는 무의식의 표현이다. 잠재된 욕망을 토해내는 분출구다. 그러나 공개된 장소로 뛰쳐나가면 그것은 저항과 반항의 몸부림으로 돌변한다.

1960년대 후반,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미국 뉴욕의 흑인 젊은이들은 건물 벽과 다리 난간, 지하철 등에 그들의 불만과 주장을 낙서로 표현했다. 재료는 스프레이 페인트. 그들은 원색의 스프레이를 가지고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거리낌없이 드러냈다. 소위 ‘낙서 그림’이라고 하는 그라피티(Grafiti)는 이렇게 뉴욕의 길거리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했다.

특유의 즉흥성과 무질서, 그리고 태생적 한계 때문에 그라피티는 오랫동안 ‘뒷골목의 낙서’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자유와 반항이라는 젊은이의 공동 의식을 기저에 깔고 그라피티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점차 유럽과 미국의 ‘거리 미술’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장 미셸 바스키아, 키스 헤링, 장 뒤 뷔페 같은 세계적 화가들도 배출했다.

아직 낙서 문화에 대한 인식이 확립되지 않은 국내에서 그라피티는 극소수 마니아에 의해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1997년 한차례 그들만(?)의 작은 전시회가 열린 적이 있으나 여전히 어둠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아직도 ‘문제아들의 치기어린 장난질’정도만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역시 미국 흑인문화의 한 장르인 힙합(Hip Hop) 열풍이 한차례 쓸고지나간 1999년말 국내에서도 그라피티 작가(Writer)를 자처하는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터넷상에 그라피티 사이트를 만들어 공개적인 활동을 하는 동호인도 나타났다. 음지에 있는 작업의 특성상 이들은 대부분 소그룹을 형성해 활동한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인터넷 사이트를 구축한 그라피티 작가 반달(27)은 그라피티의 매력을 “젊은이의 갇혀있는 열정을 액자의 갇힌 틀에서 벗어나 공개된 공간에서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그는 8명의 동료와 함께 ‘VAF’(Vandal Art Factory)라는 동호인 그룹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VAF는 아트 디렉터와 테크노 음악가, 웹디자이너, 인디밴드 기타리스트, 익스트림스포츠 마니아, 자전거 묘기를 하는 BMX 멤버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신세대 젊은이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한 작업실에서 각자의 취미를 즐기면서 그라피티 프로젝트가 있을 때면 한데 뭉쳐 작업을 진행한다.

그들은 그라피티가 ‘즉흥적, 충동적’이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평소 작업실에서 스케치 밑그림 작업을 그리고 구상하며 실전에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달은 “물론 길을 가다 단지 벽이 맘에 들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내 그라피티 작가들은 충동적으로 공공장소에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말한다.

국내에서 그라피티 작가들의 활동 폭은 극히 제한돼 있다. 캔버스가 될 대부분의 건물이나 교각, 지하철 역사 등의 벽이 그라피티 금지 지역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라피티를 했다는 작가 치고 경찰서에 한두번 끌려가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공공장소의 벽이나 바닥에 대한 정확한 관리 주체가 없어 대부분 훈방조치된다.

하지만 그만큼 장소 허가를 받기도 까다롭다는 이야기다. VAF의 강태우(28) 실장은 “미국의 그라피티 문화가 흑인의 찰나적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민중 미술의 저항적 요소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며 “그라피티가 국내에서 젊은이의 고유 문화로 자리잡기 위해선 국민의 인식 전환과 함께 문화 산업과 연관돼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료 선택에도 큰 제약이 있다. 그라피티의 발상지인 미국에서는 작가들을 위한 그라피티 전용 스프레이의 종류가 무려 300~400여종에 달한다. 반면 국내에서는 자동차 코팅 재료로 나오는 30여종에 불과하다. 다양한 질감과 색깔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이 분야의 일부 선구자는 그라피티를 직업으로 하고 있다. 작가 장태준(24)씨는 이 직업만으로 월 200~300만원 가량의 수입을 올린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장씨는 문자 도안과 벽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2년전 미국에서 그라피티를 접한 뒤 그라피티에 흠뻑 빠져 이 길로 들어섰다.

PC방 콜라텍 호프집 소주방 중국 음식점 등과 같은 업소에 벽화 그림 의뢰를 받거나 이벤트가 있을 때 시연회를 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장씨는 “처음 학교 진입로와 학생회실에 그림을 그렸을 때 관리 아저씨는 물론이고 같은 학생들한테도 ‘왜 멀쩡한 벽에 낙서를 하느냐’고 핀잔을 받았다”며 “미국이나 유럽 일본 같이 합법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을 제공받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말했다.

본래 그라피티에는 장르 구분이 없지만 국내에서는 유입 경로에 따라 두 갈래로 나눠진다. 힙합 문화에 빠져 있다가 그라피티를 시작하거나 순수회화를 전공하다 그라피티에 뛰어드는 경우다.

전자는 흑인 특유의 저항적인 갱스터 형식의 어두운 면이 많이 강조된다. 후자는 대개 선이 가늘고 색감이 밝으며 문자보다는 캐릭터 위주의 작업을 한다. 국내에서는 아직 그라피티 자체를 하나의 문화로 인정하기 보다는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편이 강한 실정이다.

세계적으로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 많기로 유명한 우리나라 대도시들. 그곳의 삭막한 콘크리트 벽이 젊은이의 자유와 열정으로 채워지는 것 또한 그 사회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가 될 수 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05 19:21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