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의 봄길 트레킹- 정선 북면 구절리~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피설(避雪)’이란 말은 도회지 사람들에게는 낯설다. 말 그대로 눈을 피해 따스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다. 한반도 남한 땅에서 눈이 가장 많이 오는 곳은 강릉시와 평창의 산간지방. 그 중에서도 강릉시 남단인 왕산면 일대는 악명이 높다.

‘폭설로 인한 고립’이 매스컴에 보도될 때마다 왕산면은 빠지지 않고 명단에 오르는 눈마을이다. 주민들은 초겨울이면 트럭에 소를 싣고 집단으로 이주한다. 주로 강릉이 그들의 피설지이다.

눈이 오면 ‘산속의 섬’이 되는 이 곳은 눈이 오지 않는 계절에도 섬이나 다름없는 오지이다. 해발 700~1,200㎙의 험한 산세의 둘러싸여 있고, 교통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빛나는 자연이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정선 북면 구절리의 끄트머리인 종량동에서 왕산면 대기리 닭목재까지 실핏줄같은 왕복 1차선 비포장도로가 나있다. 약 20㎞. 산간마을에 온기를 전달하는 말 그대로 핏줄이다. 길은 소나무처럼 푸른 송천(松川)을 따라간다.

국토의 아름다운 속살을 싫증이 나도록 보고싶다면 이 길을 걸어보자. 부지런히 걸으면 1박2일, 여유있게 일정을 잡으면 2박3일이면 족하다. 자동차로도 주파할 수 있지만 일반 승용차는 수백번 바닥을 긁히는 데다 다른 차와 마주치면 교행할 공간을 찾느라 애를 먹는다.

그리고 ‘주마간산’이 되기 십상이다.

트레킹은 정선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노추산 등산로 입구인 종량동은 정선군의 북쪽 끝. 종량동을 지나자 마자 강릉시 왕산면이라는 입간판이 나온다. 왼쪽으로 송천을 두고 길이 나있고 길은 노란 신록에 뒤덮여 있다.

송천은 오대산에서 발원해 평창군 횡계리를 지나 이 곳으로 흘러든다. 정선 아라리의 고향으로 유명한 아우라지에서 골지천과 만나 조양강이 됐다가 영월의 동쪽을 흐르는 동강이 된다. 동강을 아는 이들은 동강의 최상류인 이 곳의 물빛을 짐작할 수 있다. 석회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바닥이 희고, 물색은 신비로운 비취빛이다.

그 비취색을 배경으로 연분홍 진달래, 흰 돌단풍이 꽃을 피웠다. 물을 따라 각종 기암도 널부러져 있지만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톱도 많다. 다리를 쉬고 쉽다면 아무 모래톱에 앉거나 누우면 된다.

동초밭, 가락동, 소란등 정겨운 이름의 마을들이 나타난다. 마을이래봐야 3~4가구에 불과하다. 모두 밭일을 나가고 집은 텅 비었다. 조금 규모가 있는 마을은 트레킹 코스의 중간 지점에 있는 한터. 자그마한 가게가 있는데 민박이나 야영에 대해 문의할 수 있는 곳이다.

대기리에 가까운 새터에서 길과 냇물은 두갈래로 나뉜다. 왼쪽길은 수하계곡을 지나 횡계로 빠지는 길이고, 오른쪽길이 대기리에 닿는 길이다. 길은 송천과 이별하고 대기천과 만난다. 송천만큼 크지는 않지만 물빛은 그보다 곱다.

대기리에는 요즘 410번 지방도로를 놓느라 공사가 한창이다. 길은 35번 국도와 만나 구산에서 영동고속도로와 바로 이어진다. 이 오지에도 구름처럼 사람이 몰릴 날이 머지 않았다. 주민들도 큰 길이 나서 좋기는 하지만 그 점이 고민스러운 모양이다.

“올 여름 사람들이 많이 찾아 오겠네요”라고 물었더니 “마을 입구에 철문을 달고 자물통으로 채워 놓을 예정”이라고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구절리 종량동에 들어가려면 정선군 북면 여량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구절리부터 걸어야 한다. 여량발 구절리행 버스는 하루 4회(오전 7시30분, 9시30분, 11시50분, 오후 4시50분) 운행한다. 강릉시내버스터미널에서 동진버스(0391-653-8011)가 대기리까지 하루 세 차례(오전6시, 낮12시, 오후5시) 출발한다. 대기리에서 출발하는 시각은 1시간30분 후이다.

권오현 생활과학부차장

입력시간 2000/05/0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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