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뱃길 따라 간 고려 찻그릇

물이 흘러 강을 이루고 그 강을 따라 물길과 뱃길은 옛부터 우리네 인생의 온갖 애환을 실어날랐다. 영산강 물길이 쉬어 돌아가는 나주 영산포. 조선시대 나주 사기장인에게도 영산포는 애수와 몽환의 포구였다.

분청사기그릇 한짐을 지고 선창가에서 흥정을 하는 무명 사기장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의 상술과는 달랐던 것이다.

목사고을 나주 찻그릇의 고향을 찾아 배꽃이 핀 하얀 들판을 따라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사구실 옛 가마터로 향했다. 나주는 조선 성종 때 해양기행문학의 백미인 ‘표해록’을 남긴 최부의 고향이기도 하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촉촉히 내린 들판은 “돈이 되지 않은 농사이지만 주어진 운명을 체념할 수 없어 오늘도 농사를 준비하러 나왔다”는 늙은 농심에서 깊은 삶에 의지를 느끼게 하였다. 야산 대숲 사이길로 오르니 가마터는 밭의 개간으로 완전히 파괴돼버렸다.

감나무 위쪽으로 무너진 가마벽과 무수한 갑발 퇴적층을 볼 때 이곳 가마터에서 14세기∼15세기에 걸쳐 양질의 분청사기를 구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도편의 종류는 사발, 병, 항아리, 찻그릇 등 다양하며 15세기 일본 차인이 좋아했던 국화무늬 찻그릇 도편과 그릇 안바닥에 ‘내섬’(內詹)이란 명문이 음각 된 도편이 발견되고 있어 이 가마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입증해주고 있다.

15세기 이곳 가마터에서 제작된 찻그릇들은 영산강의 뱃길을 따라 일본 무역전진기지인 거문도를 통하여 일본으로 전래되어서 ‘고려 찻그릇’이라 하여 중세 일본 차인에게 크게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나주시에는 다시면 운봉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비롯한 13군데 가마터가 있다. 주로 다도면 나주호 주변과 금성산 서쪽 줄기에 집중되어 있고 일부는 나주호 속에 잠겨버려 흔적조차 사라져버려서 기행자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일본역사에서 고려 찻그릇이란 무엇인가?

1989년 일본의 고도(古都) 쿄토(京都)에서 열린 고려찻그릇(高麗茶碗)에 관한 심포지움에서 일본인 학자 하야시야세이죠(林屋晴三)씨는 고려 찻그릇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감명 깊은 이야기를 하였다.

“고려 찻그릇은 물론 조선시대의 막사발이긴 하지만 우리 일본인에게는 신앙 그 자체다. 우리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했고 한없이 기쁘게 했으며 또 숭고하게 했다. 우리의 마음을 영원한 안식처로 이끌어 주었던, 우리에게는 보물 아닌 신(神)과도 같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이처럼 고려 찻그릇에 관한 가치를 일본의 역사와 민족적 정서에 입각하여 잘 표현한 말과 글은 필자 뿐만 아니라 한국 학계에서도 처음으로 접하였을 것이다.

고려 찻그릇은 정말 일본인에게는 500년 동안 신앙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고려 찻그릇이란 14세기말∼16세기말 조선시대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의 흙의 특성을 바탕으로 하여 사구실, 사기실, 사기점골, 사기막골 가마에서 구워져 일본 차회(茶會)에서 찻그릇으로 사용한 것을 일본 차인들이 고려 찻그릇이라 명명(命名)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일본에서 고려 찻그릇의 종류는 ‘하나미시마’(花彫三島:인화문 찻그릇), ‘고비기’(紛引:덤벙분청 찻그릇), ‘하께메’(刷毛目:귀얄문 찻그릇), ‘이토’(井戶:모래가 섞인 막백자 찻그릇) 등이 있다.

이들 찻그릇들은 16세기 후반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으나 현재 일본에서는 국보 또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한국 도자사의 신데렐라로 추앙을 받고 있다. 고려 찻그릇의 크기는 구경이 15.5cm ∼16cm, 높이가 9cm 정도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05/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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