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섬 찻그릇' 만의 독특한 멋

일본의 중세 무로마치(室町)시대의 ‘차회’(茶會)란 ‘화려한 국제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시골뜨기’ 고려 찻그릇에게는 새옹지마적인 두 가지 다른 삶의 길이 있었다.

전반부는 조선에서 가난한 서민의 밥그릇으로의 일생이었고 후반부의 삶은 일본의 최상류층 차회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찻그릇으로의 화려한 일생이였다.

이와 같은 신데렐라적인 고려 찻그릇의 운명은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보랏빛 요와 금실로 무늬를 놓은 화려한 비단옷 속에 따뜻하게 쌓여서 몇겹의 상자 속에 모셔져 국보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도쿄(東京) 국립박물관이나 개인미술관 또는 유명 사찰에 소장돼 있다.

이처럼 역사적인 사실을 볼 때 그릇에도 우리네 인생처럼 운명과 팔자란 게 있는 모양이다.

고려 찻그릇이란 불가사이한 미를 발견한 사람들은 센노리큐(千利休)를 위시한 일본의 중세 차인(茶人)이었다. 그들은 인공적인 작위(作爲)가 수반되지 않고 우리나라 남도지역 산천의 흙, 불, 유약, 물과 조선 사기장인의 순수한 마음씨가 자연스럽게 조화돼 만들어진 것에 대한 탁월한 미를 발견했다.

고려 찻그릇은 조선의 사기장인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를 발견한 것은 중세 일본의 차인들이었고 또 그 미(美)를 사회적으로 전파시켜준 세력은 집권 무사계층에 의해서였다. 고려 찻그릇의 영원한 미는 이처럼 세 가지 요소가 겹쳐졌기 때문에 비로소 그 탄생이 가능했던 것이다.

영산강 유역에 매장된 도토(陶土)들을 분석해보면 철분이 함유된 흑운모암이 오랫동안 풍화돼 빨간 색을 띄고 있다.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 가마터에서 발견되고 있는 찻그릇 도편의 태토(胎土)에도 철분이 다량 함유되어 가마에서 구웠을 때 색상이 적갈색으로 나타나있다. 토양학자들은 한국의 남부지방에 매장되어 있는 적색토를 과거 열대기후에서 만들어진 고토양으로 해석하고 있다.

길용리 가마터에서 발견되는 찻그릇 도편을 분석해보면 그릇 안바닥과 굽에 눈비짐이 4개 혹은 6개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찻그릇 안쪽과 바깥쪽의 귀얄 붓자국은 조선시대 사기장인의 자유분방한 심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 가마터에서 발견되고 있는 찻그릇 도편중에 찻그릇 안바닥에 국화꽃 무늬가 조각된 가운데 ‘내섬’(內詹)이라는 두 글자를 도장으로 찍어놓은 도편이 수없이 발견되고 있다.

내섬(內詹)은 ‘내섬시’를 지칭한 용어로서 조선 태조 1년(1392)에 설치했던 덕천고(德泉庫)를 태종 3년(1403)에 개칭, 정조 2년(1802)까지 존속하였던 관청이다. 궁중에 대한 공상(供上)과 2품 이상 벼슬을 가진 사람에게 주는 술, 일본인, 여진인에게 주는 식물과 직포 등의 일을 맡아보는 곳이었다.

‘내섬’명의의 찻그릇은 현재 일본에도 많이 남아있다. ‘내섬’명문과 인화문 조각이 잘 조화되어 디자인된 영광 내섬찻그릇은 분청사기 찻그릇의 독특한 장르를 형성하였으며 전라남도 지역의 몇 곳의 가마터에서만 비슷한 찻그릇 도편이 발견되고 있다.

영광 길용리 가마터는 백수읍에서 원불교발생지인 영산성지와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소태산 교주께서 이곳에서 ‘만고일월’(萬古日月)이란 무극대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기행자는 시간이 갈수록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 자꾸만 파괴되는 길용리 옛가마터에서 ‘완중일월’(碗中日月), 즉 찻그릇에 해와 달이 비치고 있다는 옛 차인들의 진리가 순간 스쳐지나갔다.

입력시간 2000/05/1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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