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동대문 운동장 야구장 자리에는 조선조 말엽 군사훈련장이었던 ‘하도감’(下都監)이라는 것이 있었다.

고종 19년(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때 일본 군인 굴본예조(堀本禮造)가 조선 군인을 훈련시키다가 피살된다. 당시 청나라 수양제독 오장경(吳長慶)이 육·해군 5,000명을 거느리고 이곳에 있었다.

그뒤 두 달만에 원세개(袁世凱)가 또 2,000명을 인솔하고 와서 함께 주둔하고 있다가 고종 21년(1884)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청나라 제독 원세개, 장광전(張光前), 오조유(吳兆有)가 친일파인 개화당 내각을 전복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 고종이 자리를 옮겨있는(移御) 북묘(北廟)로 들어가 일본 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과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을 몰아낸다.

그리고 고종을 모시어 창경궁의 선인문(宣仁門) 밖 오조유의 병영으로 옮기었다가 다시 제독의 본영인 이곳 하도감으로 옮겼다.

그 이튿날 이곳에서 새로 내각을 임명하고 이어 김옥균, 박영효 등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고종은 창덕궁으로 환궁하는 등 하도감은 개화파와 수구파의 숨가쁜 회오리가 펼쳐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임오군란!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 이듬해에는 종래의 훈련도감, 금위(禁衛), 어영(御營), 총융(摠戎)의 오영(五營)을 무위(武衛), 장어(壯禦)의 2영으로 개편하자 여기에 소속하게 된 구영문(舊營門)의 군병과 신설 별기군간의 차별 대우로 갈등을 빚게 되었다.

더구나 구영문 소속의 군인에게는 월급이 밀리는 것에다가 병조판서 민겸호(閔謙鎬)의 횡포까지 겹쳐 군란(軍亂)이 일어났다. 뒷날 이를 두고 ‘임오군란’이라 역사는 쓰고 있다.

장충단 공원이 있는 신라호텔 옆 고갯마루길이 옛 버티고개다. 지금은 흔적 조차 없어졌지만 이 버티고개 마루턱에는 서울의 성곽 4소문 가운데 하나인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다. 이 남소문으로 인해 지금의 장충동 일대는 한때 남소동으로 불렸고 이곳에 병영이 있었으니 남소영(南小營)이다.

남소문 옆에는 조선시대 수도방위와 왕실 호위를 맡았던 어영청(御營廳)의 분영이 있었는데 바로 남소영이었다. 남소영은 건물만 194간에 이르고 영내에는 52간의 화약고가, 그리고 북쪽에는 137간의 남창(南倉)이 있었다.

수도경비를 맡았던 금위영 화약고도 남소문 부근에 있었다. 남소문 부근에 이러한 시설이 집결된 데는 도성방어의 요충지인데다가 교통이 좋아 한강진에서 곧바로 물자수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금 장충동에서 버티고개로 통하는 장충단길 오른쪽에는 ‘장충단 공원’이 자리했다. 길과 공원, 동네 이름을 낳게 한 장충단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乙未事變)때 순직한 충신과 열사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고종황제가 세운 초혼단(招魂壇)이었다.

옛 남소영 자리에 있던 사당은 6·25때 불타버리고 호텔신라 서쪽의 큰 길가에 있던 장충단비는 1969년 공원안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렇게 군사시설과 군부의 갈등으로 얼룩진 이 일대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 김영삼 전대통령의 ‘회고록’을 보자.

“김영삼 전대통령이 NYT 회견문제로 국회제명을 하루 앞둔 1979년 10월3일 저녁, 장충동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공관에서. 김재규는 ‘박정희가 제명, 구속은 물론 당신을 죽이려들 것’이라며 기자회견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토록 종용하자 ‘나보다 박정희가 먼저 죽을거요. 김부장도 조심하시요’라고 김 전대통령은 답했다. ‘총재님 또 뵙겠습니다’라는 김재규의 말에 김 전대통령은 ‘김부장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거요’라며 헤어진다.”

그리고 얼마뒤 김 전대통령의 말은 적중했다. 장충동! 우리 역사에 영욕의 현장이다.

입력시간 2000/05/1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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