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에서 해마다 수백개의 ‘국제’란 이름을 붙인 영화제가 열린다. 왜 수많은 도시가 이처럼 영화제를 좋아할까. 어떤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든 그 목적은 그 도시의 이익에 있다. 나아가 자국 영화의 발전과 해외진출에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칸은 우리나라로 치면 아주 작은 해변의 휴양마을이었다. 해마다 프랑스 사람과 외국인이 그곳에서 요트와 해수욕, 일광욕을 즐긴다.

칸 사람들은 “칸에서의 휴양을 보다 즐겁게, 그리고 의미있게 만들어 줄 수 없을까, 그래야 해마다 지루해하지 않고 칸을 찾을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고심 끝에 칸은 영화제를 시작했다. 영화제 역시 단순히 이벤트성으로 반복되면 아무 매력이 없다.

그래서 칸은 전통과 예술과 권위를 추구했고 결과는 세계 최고의 영화제가 됐고 영화제가 열리는 동안 칸은 최고의 호황을 누린다.

이탈리아의 베니스 역시 마찬가지다. 휴양과 관광도시에서 영화제를 열고 있다. 영화제는 비엔날레와 맞물리고 사람들은 전시회도 보고 영화제도 즐길 수 있다.

또 몬트리올이나 모스크바처럼 세계 우수영화를 선정하는 행사로서 영화제를 여는 곳도 있다. 자국의 영화가 강하고 영화시장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경쟁력있는 자국 영화를 영화제에 참가시켜 외국에 알리고 각국 영화인들로 하여금 이를 수입하도록 홍보한다.

또하나는 영화나 여행과 특별한 관계가 없지만 영화제를 여는 도시 가운데 낭트나 로카르노 같은 도시도 있다. 영화제를 통해 도시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이다.

이런 영화제일수록 규모나 축제성, 구색맞추기 보다는 철저히 예술지향적이거나 테마 중심으로 운영된다. 로카르노는 신인 발굴, 낭트는 제3세계 영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예 장르와 지역을 제한하는 영화제도 있다. 단편영화제나 라틴영화제 같은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 영화제도 있다. 비경쟁이어서 권위도 없고, 휴양이나 여행과 별로 연계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특색을 갖춘 것도 아니고, 마켓기능도 못하고, 축제라고 하지만 여기저기서 영화만 상영하는. 이런 영화제는 처음에는 요란하다. 마치 풍성하고 귀중한 잔치인 것처럼 떠벌린다.

자연히 규모에 집착하고 수퍼마켓식으로 작품수만 늘린다. 그리고는 남대문 시장의 좌판 주인처럼 “골라, 골라. 두번 다시 없는 기회”라고 떠든다. 가능하면 유명스타를 억지춘향식으로 모셔와 분위기를 띄우려 한다.

그러나 찬치도 한두번. 시간이 지날수록 소리만 요란할 뿐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없다. 이런 영화제가 의미가 있을 때도 있다.

배급이나 극장 사정, 아니면 흥행의 부진으로 다양한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될 수 없을 때. 소수 마니아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기회다. 또 이유야 어떻든 국민이 심리적으로 위축됐을 때 영화제는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부산영화제나 부천영화제는 어디에 해당할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마지막 것에 해당된다는 느낌이다.

‘아시아 영화의 창’이니 ‘판타스틱’이니 하는 성격을 부여했지만 많게는 200편이 넘는 영화를 끌어모아 숨가쁘게 상영하고는 끝이다. 그것으로 ‘영화제가 열린다’는 것은 세계에 알렸지만 영화제가 남긴 실질적인 이익은 보이지 않는다.

제1회 전주 국제영화제가 끝났다. 또하나의 영화제가 아닌, 이른바 아시아 인디영화, 디지털영화에 시선을 맞춘 대안영화제를 표방했다. 소수 마니아와 젊은 층을 겨냥했으니 당연히 다른 곳보다 관객(10만명)도 적었다.

전주에서 이런 성격의 영화제가 열리는게 맞는가 라는 논의는 이제 유효기간이 지났다. 이제는 테마, 지역영화제로 그 색깔을 유지하느냐가 문제다. 그럴려면 잔치 거품과 대중성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 전주는 원래 예향(藝鄕)이다.

이대현 문화부 차장

입력시간 2000/05/10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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