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gagman). 코미디언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는 국적불명의 용어다. 방송 코미디 프로그램을 비롯해 각종 행사, 밤무대 등을 위해 존재하는, 세계에서 대한민국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직업이기도 하다.

이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처량하다. ‘웃기는 인간’, 즉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방송사 관계자와 시청자의 엔돌핀 생산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탤런트 영화배우 가수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몸값, 조금만 신선도가 떨어져도 외면하는 현실 등 모든 것이 이들을 피곤하게 한다.


꿈에서도 아이디어를 좇는다

지난해 3월 데뷔한 개그맨 K씨는 늦잠을 자고 오후에야 활동을 시작하는 대부분 연예인과는 달리 아침 일찍 일어난다. 요즘은 피곤에 지쳐 잠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누나가 깨워준다.

아침은 늘 조급하다. 아이디어가 통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생짜’ 신인 시절엔 그나마 시키는 대로 하면 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최근 그가 만들어 낸 유행어가 관심을 끌기 시작했기 때문에 후속타가 필요하다.

아직은 각종 행사의 MC로 초청될 정도의 지명도는 없어 일주일 내내 방송국으로 출퇴근한다. 하루에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방송국에서 보낸다. 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선배들의 연기 지도와 아이디어 회의. ‘이것을 놓치면 안된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임할 뿐이다.

점심 식사는 인근 식당에서 해결한다. 아직 한번도 밥값을 내본 적이 없다.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그맨 사이에선 선배들이 ‘봉’이다. 밥 먹을 시간이 촉박하면 방송국의 구내 식당을 이용하고 더 바쁠 때는 빵과 우유로 간단하게 해결한다.

연습이 새벽까지 가는 날도 있지만 대부분 밤 12시께 끝난다. 집에 도착한 이후 컴퓨터를 켜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일과. PC통신과 인터넷 유머란을 모조리 검색해본 후 비교적 방송용으로 괜찮다 싶은 것을 골라 수첩에 빠짐없이 기록한다. 재미있는 것이 많은 날은 편안히 잠든다.

하지만 다음날 있을 아이디어 회의에서 발표할 것이 하나도 없는 날이면 걱정으로 몸을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붙인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본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가끔 방송을 보고 연락해오는 친구들이 있지만 연락처를 어디다 적어 놓았는지 생각이 안나 안타까울 때가 많다.

한달 수입 240여만원. 1회 출연료가 20만원인데 3개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번 돈이다. 절반은 저축하고 절반은 의상비를 포함한 각종 생활비로 쓴다. 아직 여자친구가 없어 그나마 씀씀이가 적다.

그는 녹화가 있는 날 가장 외롭다. 탤런트 가수들의 경우는 대부분 따라다니며 스케줄을 관리해주는 매니저가 그에겐 없다. 스스로 의상도 챙겨야 하고 이것저것 소품도 준비해야 한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물어오는, “매니저가 누구냐”는 질문은 늘 당황스럽다. 그는 매니저를 둘 정도로 여유가 있지 못하다. 비교적 인기있는 그의 선배들도 매니저 없이 활동한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밤 11시 공개녹화를 마치고 커다란 가방을 들고 방송국을 나선다. 아직 자가용이 없기 때문에 택시를 잡아야 한다. 그를 알아보고 소근대는 사람들이 스쳐간다. 문득 외로움이 엄습한다.


인기를 얻으면 더 쫓긴다

데뷔 7년만에 인기 대열에 올라선 S씨. K씨가 겪어온 과정은 이미 지났다. 그는 갑작스레 찾아온 인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2년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자신의 주소가 최근에야 비로소 공개되면서 분당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문은 팬들의 낙서로 원래 색깔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래도 마냥 기쁠 따름이다. 하도 많은 팬이 집을 찾아와 급기야 집을 분당에서 동부이촌동으로 옮겼다.

오전 11시 집을 나설 때면 어머니는 “늘 주변 분들께 감사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언제 다시 돌아갈지 모르는 무명시절을 걱정하는 어머니. 개그맨 한답시고 젊은 날을 송두리째 희생한 아들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안하신 어머니를 떠올리면 웃기다가도 슬퍼진다.

그의 기상 시간은 9시. 후배들이 많이 들어와 그래도 몸은 편해진 편이다. 하지만 아이디어 싸움엔 선후배가 없다. 치열한 아이디어 전쟁이 없으면 곧 잊혀지게 되는 ‘이 바닥의 생리’를 잘 알기 때문에 하루도 여유있는 날이 없다.

그러나 웃기려고 태어난 인생이 후회스럽지 않다. 남들에게 행복한 기분을 전파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낀다. 나이 서른이 넘어 겨우 밥값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일이 많다. 이를 개그에 이용해 보려는 생각도 하고 있다.

한달 수입은 740만원 가량. 방송 출연료 240만원에 각종 행사의 MC로 500만원 정도를 벌고 있다. 한달에 한번 정도 있는 무대행사지만 한번 다녀오고 나면 정신이 쏙 빠진다. 하지만 그를 보고 웃고 즐거워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힘을 얻는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출연하는 가수들이 받는 대접을 보고 나면 다시 힘이 빠진다. 두 시간을 열심히 떠들고 받는 돈이 노래 한곡 부르고 가수들이 받는 돈의 절반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 4시간 잔다

데뷔 12년째인, 중견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개그맨 C씨(36). 그는 자신의 현실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다. 이렇다 할 유행어도 만들지 못했고 인기 프로그램도 없다. 그래도 방송에 얼굴을 가끔 내밀기 때문에 아직까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하루 4시간 밖에 못잔다. 일주일에 5회 가량은 밤무대 MC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인천과 수원에 있는 나이트 클럽 무대에서 목이 터져라 외쳐도 한달 수입은 1,000만원이 조금 넘는다.

교통비, 의상비와 후배들 밥값(지출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자신의 약값 등을 제하면 그리 많은 돈이 남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절반은 저축을 한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게 되면 갈비집이라도 하나 차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언제 후배에게 밀려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허세를 떨 여유가 없다. 그래도 그는 “현재에 최선을 다한다”고 말한다.

‘웃기는 인간’의 생활은 의외로 치열하다. 삶에 대한 무거운 고민도 있고 주변의 기대 수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도 있다. 그들도 집안에 들어서면 어깨가 무거운 가장인 경우가 많다. 일반인과 다른 점이라면 단지 남들 웃기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사실.

이들 ‘웃기는 인간’의 공통된 바람은 의외로 소박하다. “팬들의 엔돌핀 생산을 위해, 거창하게는 밝은 사회 구현을 꿈꾸며 오늘도 발가벗을 각오가 되어있는 우리들을 위해 잠시 목에 힘을 빼고 실컷 웃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들의 작은 소망이다. 이들을 보아서라도 코미디 프로그램 볼 때는 목에 힘을 조금 빼는 것이 어떨까.

오태수 일간스포츠 연예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10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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