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장이라더니 정말이군. 조제비가 꼼짝을 못하는군.” 단장인 윤기현은 검토실에서 조훈현의 패배를 선언한다.

제3국의 패착은 딱히 꼬집을 수가 없었다. 흔히 잘못된 수가 나오고 그것으로 인해 바둑을 버려놓게 되면 패착이라 부른다. 그런데 간혹 이 3국처럼 이유를 모르는 패배를 당하기도 한다. 그것은 상대가 완벽에 가까운 솜씨를 보일 때다.

따라서 나의 실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너무나 미세한 실수여서 캐치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이겼다고 보면 된다.

조훈현은 이렇게 2주일간의 중국대국에서 1승2패의 성적표를 안고 돌아온다. 1승2패. 일본에 있는 조치훈은 3패후 4연승도 곧잘 해댄다. 그런데 고작 1승2패 가지고 뭘 그럴까. 벼랑끝이긴 하지만 아직 떨어진 건 아니다. 위험하긴 하지만 나가떨어진 건 아니다.

운명의 제4국은 5개월을 훌쩍 넘겨 다가온다. 싱가폴이었다. 인구 300만의 세계적 무역항 싱가폴. 혹자는 제3국이라고 공평한 매치라고 여기겠지만 이곳도 화교의 천국이니 적지이긴 마찬가지다. 세불리를 통감한 제갈공명이 한중 땅을 수복하고자 후주 유선에게 낸 출사표와 진배없는 형국이다.

막판이다. 막판에는 살 떨리고 심장이 요동쳐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든 고통을 수반한다. 조훈현으로서는, 아니 한국 바둑으로서는 세상천지 그 어떤 승부보다 흥분되고 무서운 한판이었다. 그러나 단 한사람, 조훈현만큼은 객지의 냉담함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전의가 불타오르기만 했다는 사실은 통쾌한 일이었다.

덤을 7집반이나 내야하는 극단의 승부. 그러나 그것도 핑계는 못된다. 제3국에서 네웨이핑은 잘도 버텨내었으니 말이다. 이젠 조훈현이 매를 맞을 차례. 역시 조훈현은 지난 5개월간 상당한 준비가 되었음이 틀림없었다.

흑을 든 조훈현은 2국때와 똑같은 포진을 선보이는 게 아닌가. 수순이 조금씩 이어질 때마다 네웨이핑은 끝간데 모르고 이어지던 담배연기 속으로 조훈현을 힐끔힐끔 응시하곤 했다. ‘과연 이 사람이 어디까지 같이 둘 것인가. 연구가 많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것은 용기였다. 자신이 졌던 바둑을 또다시 그대로 깔아놓는 건 용기다. 이긴 바둑을 재미삼아 또 들고 나오는 건 취향이지만 진 사람이 똑같이 들고나오는 건 공부가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철의 수문장’, ‘대륙의 반달곰’ 네웨이핑의 거대한 심장을 노크할 수 있었다.

그랬다. 정면돌파만이 전면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네웨이핑에겐 엄포였다. 다름이 아니라 다시 두면 이겨가는 길을 보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공부가 진짜 되어있는 것인지, 되어있다고 읽어달라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포커판에서 베팅이 세다고 꼭 메이드가 된 패라고 읽어줄 필요가 없는 것이나 똑같다.

네웨이핑도 3국에서의 조훈현과 흡사하다. 믿을 것은 현찰밖에 없다는 투로 실리지향을 고집한다. 자연스레 세력과 실리의 대결로 굳어진다. 말이 세력작전이지 하는 수 없이 중앙으로 내몰린 조훈현은 초조하기 그지없다.

분명 약속을 지키겠다던 친구에게 부득불 사정이 생겨 어길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이 세력이다. 백을 든 네웨이핑은 네 귀를 차지하고 연신 담배를 꺼내 문다. 골초 조훈현이 질 수 있나. 조훈현 때문에 유명해진 담배 장미가 벌써 몇 갑 째인지 모른다.

바둑을 두어본 사람은 안다. 중앙에다 집을 짓는 것과 모래로 성을 쌓는 것이 매일반이란 사실을. 조훈현도 그랬다. 좌변에 조금의 실리가 있었지만 결국엔 중앙집을 얼마나 만드는지가 관건. 네웨이핑은 여기저기 구멍을 뚫으려 하고 조훈현은 땜질하기 바쁘다. 옆에선 초읽기 소리가 들려온다. 이윽고 즐거운 한탄이 들려온다. <계속>


<뉴스와 화제>

· 왕관은 하나!-LG배 놓고 유창혁 위빈 마지막 승부

결승 1, 2차전에서 나란히 1승씩을 기록한 한국의 유창혁과 중국의 위빈이 제4회 LG배 결승 3국에서 맞붙는다. 5월8, 10, 12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연속적으로 3번기를 갖게 될 두사람은 지난 3월에 벌어졌던 1, 2국에서 내용상으로도 팽팽한 바둑을 보여줘 이번 시리즈의 관심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유창혁은 이미 세번의 세계대회 우승을 기록한 바 있고 위빈은 첫번째 도전.

· 이번엔 형 차례-이세돌에 이어 이상훈도 선전

무패행진을 벌이고 있는 이세돌의 형 이상훈이 신인왕전 결승에서 한종진과 맞붙는다. 올초부터 지금까지 무려 28연승 행진을 기록중인 동생에 이어 묵묵히 타이틀을 향해 대시하던 이상훈은 9일 1국에 이어 15일 2국을 치른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이상훈이 약간 앞서는 것으로 바둑가는 보고있어 어쩌면 올해는 이상훈 이세돌 형제의 해가 될 것으로 주목.

입력시간 2000/05/10 19:21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