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역시 통이 컸다. “여기가 사회주의 국가냐”며 오너의 사재출자 요구에 반발하더니 정부가 버럭 화를 내자 불과 몇 시간만에 예상 영업이익 1조4,000억원 등 3조3,000억원에 달하는 ‘꿈같은’ 현대투신 경영정상화 방안을 내놨다.

더구나 연내에 1조2,000억원의 자본잠식분을 반드시 메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정몽헌 회장의 영향력 하에 있는 비상장 계열사 주식 1조7,000억원을 담보로 제공키로 했다.

10일 가까이 버티던 현대가 조(兆) 단위의 돈을 마구 흩뿌리자 정부도 감동한 듯 “그만 하면 최선을 다한 카드”라고 바람을 잡았다. 현대의 물량공세에 놀란 증시도 처음엔 덩달이처럼 뛰었다.

그러나 현대와 정부가 시장을 얕잡아봤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정부가 현대의 처방전을 수용, 유동성 방어벽을 친 만큼 더이상 현대 상황이 악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아니었으면 주말과 주초 시장은 또한번의 극도의 배신감을 표출했을 것이다.

실제 입맛대로 출자주식의 가치와 영업이익을 부풀리고 외면받는 외자유치를 내세우는 현대식의 계산법에 외국 언론과 금융기관은 냉소를 금치못했으며 일부 언론은 정부의 금융개혁 의지에 근본적 의문을 표시했다. 현대 주가에 반영된 투자자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투명한 금융개혁으로 시장동요 최소화해야

따라서 금주, 나아가 이번 달의 관심은 투신권 부실을 해소하고 은행의 건전성을 확보하는 금융권 구조개혁이 어떻게 진행될 것이냐는 것에 모아진다. 총선 때문에 미뤄온 메스를 든 이상 이제 남은 것은 최대한 신속하고 말끔하게 투신권과 은행권의 부실을 청산하는 일이다.

문제는 국가적 부실사태에 직·간접적 책임을 진 관료와 재벌 오너, 금융기관 임직원, 노조가 여전히 ‘울면 젖주더라’는 식의 ‘도덕적 해이’에 빠져 공적자금에만 침을 흘리고 집단 이기주의에 탐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죽 했으면 ADB 연차총회 참석차 태국에 간 이헌재 재경부장관이 현지에서조차 “투신사들은 그동안 돈을 벌어놓고도 정부 탓만 하며 부실정리를 늦춰왔다. 구조조정을 지연시키고 손쉬운 공적자금을 타내기 위해 채권시가평가 실패설을 퍼뜨리는 등 도덕적 해이도 심각하다”고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주식시장의 움직임을 간과할 수 없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 우리 경제가 오늘 검색해야 할 최대 주제어는 금융개혁과 재벌개혁, 그리고 수출이다.

글로벌과 디지털만이 살 길인 새천년에 외국인이 한국 금융시장의 건전성과 대기업의 내실에 대한 신뢰를 잃고 정부 정책의 일관성에 의심을 갖는다면 우리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 지난주 현대투신 사태에서 본 교훈이다.

이와 관련, 9일 열린 2단계 4대부문 추진실적 평가회의 결과와 이날 저녁 경제5단체장과 이 재경장관과의 2차 회동은 중요하다. 채권시가평가제가 예고돼있는 7월까지 남은 기간은 불과 한달반 남짓.

이 기간중 추진될 금융개혁의 골격은 금주중 확정돼야하기 때문이다. 또 공적자금의 추가조성 규모와 방법, 거시지표를 좌우하는 무역수지 전망 등도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당장 8일부터 나라종금 예금대지급이 시작된 만큼 투명한 절차만이 시장의 동요를 최소화할 것이다.


심상치않은 미국의 통상압력

대기업 입장에선 금주부터 고통의 세월이 시작된다. 국세청의 주식이동조사와 정기 법인세조사, 공정위의 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 조사가 본격화하기 때문이다.

일단은 6대 그룹 이하의 7개 그룹이 대상이나 4대 그룹도 언제 칼날이 날아들지 몰라 초조한 기색이다. 9일부터 워싱턴에서 열리고 있는 한·미 통상장관 회담도 주의깊게 지켜봐야할 이벤트다.

실제 최근 자동차분야 시장개방 요구, 한국산 강관에 대한 세이프가드 발동등 미국의 대한 통상압력이 심상치 않다.

축제분위기 속에 진행되고 있는 수입차 모터쇼, 대우자동차의 해외매각 반대를 외치는 노조파업. 자동차업계의 두 풍경은 뭔가 뒤틀려가는 우리 경제의 현주소를 묘하게 대변한다.

이유식 경제부 차장

입력시간 2000/05/1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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