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죽정상회담 준비접촉, 소모적 논쟁 사라져

분단이후 55년만에 첫 정상회담을 준비중인 남북한은 새로운 남북대화의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난 4월8일 베이징의 막후접촉에서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북한은 4월22일과 27일, 5월3일과 8일 등 숨가쁘게 4차례의 준비접촉에 임하면서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에 걸맞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남북은 회담 초반에 일찌감치 ▲평양에서 2회 이상의 정상회담 ▲육로 또는 항로를 통한 평양방문 등 굵직굵직한 실무절차를 마무리하는 등 시원시원한 결과를 도출해내고 있다.

주한미군 철수와 같이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는 정치적 사안에 대한 소모적 이데올로기 논쟁은 회담장에서 사라졌다. 서로간의 차이를 인정한 뒤 그 위에서 합의점을 도출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탈냉전의 분위기가 회담장을 지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과거 상대방에게 억지를 강요하는 풍토에서는 남북접촉의 경험이 많은 전문가일수록 북한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이 강했다”며 “이번을 계기로 과거의 대화스타일이 사라진다면 남북대화는 양측의 긴장을 해소하는 장으로 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달라진 대화스타일

이러한 북측의 자세는 4월22일의 첫 접촉에서부터 예고됐다. 준비접촉 북측 대표단장 김령성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참사는 “과거 논쟁으로 시간을 끌고 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본위적인 안을 내놓고 갑론을박하던 낡은 대화풍토를 없애자”고 말했다.

그후 북측은 실제로 의제에 충실했다. 4차례의 판문점 회담을 폐쇄회로 화면으로 지켜본 정부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북측 대표단의 ‘신사적인 태도’를 거론하하고 있다.

상대방의 말을 자르거나 의제와 상관없는 발언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얘기다. 미국 등 서방국가를 상대하는 북한 외교관의 자세가 남북대화에 도입되는 듯하다는 평가가 나올 법하다.

영화배우가 연상될 정도로 호남형인 북측 대표단장 김 참사와 대표단 진용에서도 북측의 고심을 읽을 수 있다.

김 참사는 최악의 기근을 겪었던 1996년 4월 미 버클리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석할 만큼 대외사정에 밝은 인물이다. 지난해 8월 민주노총 축구단 방북시에도 모습을 보였던 그는 일을 깨려할 때 북한이 내세우는 인물이 아니라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대표단원인 권민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참사도 1990년대 중반부터 베이징에서 남측 관계자들과 접촉하면서 외화벌이를 해온 신세대 대화일꾼이다. 나머지 단원인 최성익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은 1994년 정상회담 준비접촉에 나온 인물로서 구세대 대화일꾼으로 분류된다. ‘서울 피바다’ 발언의 박영수, 전금철 등 냉전시대의 ‘싸움닭’들은 이번 인선에서 배제된 셈이다.

또 북한은 정상회담 개최를 세계 만방에 선언한 만큼 준비접촉에서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절실한 목표가 분명한 만큼 사소한 신경전은 않겠다는 발상인 것 같다.


북, 경제난 해소에 정상회담카드 사용

사실 이번 정상회담은 예상보다 더딘 북미관계의 개선속도에서 기인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분석이다.

지난 10년간 대미관계 개선에 주력해왔으나 이렇다 할 소득을 거두지 못한 북한은 미국의 대선이 끝나는 내년초까지 대미관계의 급진전을 기대하지 않고 있다.

김일성 주석 사망이후 강력한 체제단속 덕분으로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8년 헌법개정을 계기로 전면에 나선 뒤 10년이상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해온 북한 경제를 더이상 방치할수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러시아, 중국 등 전통적인 우방들로부터 지원은 더이상 기대할 수 없다. 결국 남한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고 대외개방을 가속할 수 있는 남북 정상회담을 카드로 내놓게 됐다.

대외개방에 대한 북측의 의지는 취재차 판문점에 나온 북측 기자가 “김정일 장군은 노벨평화상에는 관심이 없으나 올해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수상한다면 국제적 지도자로서 부상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한데서도 쉽게 읽혀진다.

이같이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 6년만에 판문점에 나타난 북측 대표단은 자신들의 실무절차안을 공개한 2차 접촉이후 15개항 안팎의 실무절차 대부분을 타결했다.

남북이 조기에 합의한 절차는 ▲2회 이상의 정상회담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 교통수단 ▲정상회담 의제 등이다.

그러나 남측 취재단의 규모, 통신위성을 통한 통신및 위성 생중계(SNG) 방식과 대표단 평양방문 2주전 사전답사팀 파견, 3일전 선발대 파견일정 등의 경우 양측이 4차 접촉 막판까지 줄다리기를 벌인 대목이다.

평양의 주요 시설과 인물동정이 실시간으로 남측에 공개되고 보도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한 사안 등에 북측이 예민한 것으로 보아 향후에도 준비접촉에서도 체제개방 문제과 관련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울 것으로 보인다.


“평화선언 자연스럽게 도출될것”

아울러 4차례의 준비접촉을 통해 남북한 양측이 구상하는 준비접촉의 밑그림은 사뭇 다르다는 점도 지적된다.

남측 준비접촉 수석대표인 양영식 통일부차관은 1차접촉 직전인 4월21일 “준비접촉은 단지 정상회담 절차문제를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라 정상들이 만나서 남북현안을 풀 수 있도록 길을 닦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측은 준비접촉의 성격을 회담절차 협의로 한정하고 있다. 정상회담 개최전 모든 의제의 세부내용을 사전조율해 정상간 공동성명의 윤곽을 확정하는 서방식 절차를 거부하겠다는 눈치다.

북측이 회담 의제를 ‘7·4 남북공동성명의 3원칙과 민족의 화해와 단합, 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로 뭉뚱그리려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이와 관련, 당국자들은 “남측이 정상회담을 통해 북측에 줄 수 있는 카드는 분명하지만 북측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거의 없다”며 “따라서 북측은 의제를 모호하게 해 김정일의 ‘신비성’과 체면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당국자들은 6월12일~14일 정상회담에서는 우리측이 원하는 의제가 양측 정상간에 논의될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남북한의 군사·정치적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경협을 가속화하는 평화선언이 자연스럽게 도출될 것이라는 얘기다.

결국 준비접촉의 순항에 따라 양측의 발걸음은 ‘경호·통신 실무자접촉→사전답사팀 평양방문→김대통령의 체류일정 1차 조율→선발대 파견→체류일정 최종확정’의 수순을 밟으면서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영섭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0/05/1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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