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항쟁 20주년, 광주의 5월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5월의 노래’는 1980년 광주의 아픔을 이렇게 통곡했다. 광주 북구 운정동의 5·18 묘역. 그 5월18일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군화에 짓밟혀 무참히 희생된 영령의 흐느낌이 끝없이 울려퍼진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광주’가 다시 5월을 맞았다.

5·18 20년의 역사는 ‘은폐와 왜곡, 그리고 진실과의 투쟁’의 역사였다. 우리 사회의 새로운 정치정세를 만들어냈던 5·18은 왜곡과 진실의 끝없는 투쟁을 거치면서 ‘불순분자의 폭동’에서 ‘광주사태’,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되기까지 숱한 궤적을 그려왔다.

21세기를 맞아 5·18은 ‘광주’라는 지역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까.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왜곡과 진실간의 투쟁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5·18이 그동안 걸어온 길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왜 하필 광주였나

신군부가 박정희 대통령 사후 유신체제의 복원을 시도하기 위해 비상계엄확대 조치와 전국 대학 휴교령을 내린 1980년 5월17일. ‘서울의 봄’과 맥을 같이 하며 연일 대규모 평화시위가 벌어졌던 광주에서는 전날(5월16일) 전남도청앞 횃불시위를 마지막으로 시위를 자제, 평온을 유지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17일 오후 7시께 광주에 진압부대 투입명령을 내리고 공수부대를 18일 새벽 전남대에 배치했다. 18일 오전 10시께부터 전남대 정문 앞에는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남도청 앞 횃불시위때 “휴교령이 내려지면 전남대 정문 앞으로 모이자”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귀가를 종용하는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학내 잔류학생 무차별 구타와 연행, 그리고 그것을 항의하던 학생과 군의 충돌이 발생했고 이는 5·18의 도화선이 됐다.

이후 광주에서는 공수부대의 시위군중에 대한 집단발포와 무차별 살상으로 금남로가 피로 물드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연일 벌어지면서 시민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계엄군은 5월21일 시민군에 밀려 광주를 물러났으며 계엄군의 도청진입일인 5월27일까지 광주는 사실상 무정부 도시였다.

당시 생사를 넘나드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광주시민이 긍지를 잃지 않고 민주의식을 발휘, 방화 절도등 단 한건의 강력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민주화운동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로 평가받고 있다.


광주를 전략지로 택한 신군부

1980년 5월 광주시민의 10일간의 외로운 투쟁은 신군부가 집권을 위해 마지막 장애물인 민중세력을 잠재우려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광주였을까.

“당시 광주는 박정희 정권의 지역편향적 경제개발정책으로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이 심했고 이같은 불만은 김대중에 대한 기대와 지지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광주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정치투쟁의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다. 결국 신군부가 5월17일 비상계엄확대 조치를 통해 김대중을 내란혐의로 구속하면서 이를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광주대 안종철 교수(정치학)의 말이다.

이는 신군부가 박정희 대통령 사후 군부 권위주의의 복원을 위해 광주를 전략적으로 선택, 군중심리의 폭발을 유도해 사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부는 이를 ‘폭동’으로 규정, 광주만의 지역문제로 축소·왜곡했고 언론도 ‘광주사태’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계엄사의 발표만을 추종했다. 하지만 ‘왜 광주였나’에 대해 당시 관계자들이 계속 침묵하는 한 그 진상은 밝혀지기 힘들다.

다만 당시 상황을 종합해볼 때 “신군부가 당시의 민주화 요구를 단순히 지역주의적 감정의 폭발로 왜곡, 자신의 군부통치를 정당화하려 했다”는 대강의 추측만이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다.

군부정치의 폭력성과 모순성을 여지없이 보여준 5·18은 1987년 대전환을 맞는다. 그해 1월 발생한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5월 추모분위기로 이어지고 6월 연세대생 이한열군 최루탄 피격 사망으로 민주화 열기가 더욱 가속화하면서 비로소 5·18과 광주의 진실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6·29라는 민주화 개방을 이끌어냈고 이듬해인 1988년 11월 광주 청문회 실시와 1990년 광주보상법이 제정되면서 5·18은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얻었지만 3당 합당의 정치적 산물이라는 한계로 인해 여전히 진상규명에는 이르지 못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백담사 유배’를 이끌어냈던 5·18은 1995년 5·18 특별법 제정에 이어 1997년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는다’는 또하나의 전례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YS 정권이 “5·18이 문민정부의 모태’라고 강조하면서 12·12와 5·17을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규정,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과 신군부의 핵심주역을 법정에 세운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법처리가 있기까지는 검찰에 의한 기소유예와 공소권 없음이라는 시행착오가 거듭 했고 이 때문에 결국 5·18의 사실관계는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채 정치재판으로 시작해 개인적 단죄로 마무리됐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5·18 전국화 가능한가

이처럼 5·18은 세월이 흐르면서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여전히 지역주의라는 장벽에 막혀 우리 사회에서 긴장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4년부터 5월단체가 중심이 돼 5·18을 주제로 국제심포지움과 국제청년캠프를 개최한데 이어 올해는 올해 임진각과 서울 등지에서 5·18 20주년 전야제를 동시에 여는 것도 5·18 전국화의 실패를 극복하려는 이유중 하나다.

이를 계기로 광주가 특정지역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인권과 통일의 밑거름이자 이를 상징하는 보통명사가 돼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같은 5·18 정신의 현실화를 위해서는 최초 발포명령자와 행불자, 미국의 책임론 등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작업이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광주시민의 공통된 바람이다.

5월 정신의 전국화에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이 묻혀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인권과 통일을 중심으로 한 올해 5·18 행사와 달리 5·18 진상규명을 위한 ‘안티(Anti) 5·18 행사’가 광주 한쪽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광주 유혈진압의 직접 책임자인 전두환 전대통령 등 ‘진짜 가해자’의 참회와 반성이라고 광주시민은 말한다.

광주는 이들이 진정 5월영령 앞에 머리를 숙여 광주의 상처를 치유하고 오욕으로 점철된 어둠의 5·18을 마감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어쨌든 5·18 20주년을 맞은 광주의 5월은 5·18이 역사 속에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역사 속에서 5·18을 살려나가는 것은 이 땅에 살아남은 자의 엄숙한 과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광주의 5월은 말하고 있다. 5·18이 보여준 힘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다고.

안경호 사회부기자

입력시간 2000/05/14 16:14


안경호 사회부 kh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