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 국내의 버블젯 프린터 시장에는 중대한 상황 변화가 벌어졌다. 차분한 이미지의 김규리를 앞세워 브랜드 인지도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켜오던 엡손(28%)이 삼성(마이젯·38.7%)에게 추월당한 것이다.

브랜드 인지도의 변화는 곧바로 시장 점유율로 연결됐다. 삼성 마이젯 프린터의 3월 한달 동안의 판매량이 최초로 10만대를 넘었고 점유율은 45%까지 치솟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버블젯 프린터 시장의 지각변동을 일으켰을까. 마이젯 프린터 CF모델인 전지현 때문이었다. 1m73㎝, 48㎏의 육감적인 몸매에 몽상적인 표정으로 긴 팔과 다리를 휘젓는 전지현의 섹시하면서도 도발적인 테크노 춤은 소비자의 눈길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전지현 CF는 인터넷을 통해 광속처럼 번져나갔다. 인터넷에 전지현의 동영상과 사진을 실은 개인 홈페이지가 수 백개 생겨났고 서울 용산전자상가와 테크노마트 컴퓨터 매장은 온통 전지현의 테크노 댄스 동영상이 ‘점령’했다.

심지어 광고에서 전지현이 입었던 화이트와 블랙의 착 달라붙는 가죽의상은 최근 인터넷 경매를 통해 각각 510만원과 440만원에 낙찰됐다.


에로틱 분위기 광고 쏟아져

전지현 CF의 성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지현 CF의 성공이후 ‘n세대’를 겨냥한 주요 광고마다 ‘섹스 어필’을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하고 있다.

제품 특성상 섹스어필할 수 밖에 없는 언더웨어는 물론이고 인터넷과 정보통신 등 10~20대가 주요 구매층인 회사마다 에로틱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광고들을 쏟아내고 있다.

우선 패션·의류업계. 전지현 CF이후 보다 원색적이고 대담한 광고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세대 대상의 패션내의 브랜드인 ‘임프레션’의 경우 자체 경품행사인 ‘팬티 복권’을 홍보하기 위해 ‘팬티 한번 잘 벗기면 100만원’이라는 다분히 외설스러운 카피를, 바나나로 만든 팬티만을 입은 여성모델 사진과 내보내고 있다.

또 스포츠 레저의류 브랜드인 ‘카파’는 전라의 외국인 모델이 등을 맞댄채 앉아 있는 광고를 선보였으며 청바지 업체인 ‘옹골진’은 상반신 누드의 광고로 눈길을 끌었다.

n세대를 겨냥한 ‘섹스 어필’광고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프리챌의 경우 그동안 내보냈던 교육적이고 교훈적 내용의 광고와 함께 4월부터는 두 남녀가 진하게 입맞춤하는 장면이 담긴 광고를 선보이고 있다.

이 회사 마케팅팀 이정아 과장은 “인지도 측면으로만 본다면 이전의 프리챌 광고와 비교할 때 가장 효과가 좋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밖에도 인터넷 레저전문 포털사이트인 ‘넷포츠’가 엄정화를 닮은 모델이 나신으로 스키를 신은 광고를 내보낸 것이나, 역시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웹피스텔이 전라의 여성이 돌아 누운채 팔베개를 한 광고를 선보이고 있다.


N세대 의식변화 노린 기획

그렇다면 지난해까지만 해도 술, 타이어 등에 많이 사용됐던 ‘섹스 어필’광고가 n세대를 겨냥하는 이유는 뭘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지현 CF에서 확인이 되었듯이 그같은 광고가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광고업계에서는 n세대를 타깃으로 한 ‘섹스 어필’광고가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를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번째로는 n세대의 의식구조 변화다. 이미 잘 알려졌듯이 요즘의 10~20대에게 있어서 ‘성(性)’은 더이상 숨기는 주제가 아니다.

한국능률협회 이준엽 마케팅팀장은 “최근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n세대들은 ‘예쁘다’, ‘귀엽다’라는 표현보다는 ‘섹시하다’라는 칭찬을 더욱 듣고 싶어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서울대 사회학과가 ‘서울대생의 의식과 생활’을 주제로 1992년과 1999년 각각 944명과 703명을 대상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불과 7년 동안 젊은이의 성의식이 얼마나 급변했는지 알 수 있다.

서울대의 조사에 따르면 1992년 서울대 여학생중 불과 0.4%만이 “성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는데 1999년에는 그 비율이 15.1%로 늘어났다. 또 1992년에는 조사 남학생중 44.7%가 “애인의 성경험이 문제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는데 1999년에는 그 비율이 64.7%로 증가했다.

n세대에게 ‘섹스 어필’광고가 먹혀 드는 또다른 이유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산업구조의 본질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섹스 어필’광고의 가장 큰 강점은 ‘높은 주목도’인데 n세대를 겨냥하는 대부분의 산업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도 ‘높은 주목도’라는 것이다.

전지현 CF를 성공시킨 삼성전자 마케팅팀 김재인 과장은 “요즘같이 인터넷 업체들이 우훅죽순으로 생겨나는 시대에는 누가 먼저 소비자를 확보하느냐가 성공으로 이어진다”며 “따라서 선점의 효과를 가장 확실히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광고를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누가 먼저 눈길끄느냐가 관건”

정보통신업계의 한 관계자는 “경쟁업체에 비해 3~6개월 정도만 앞서가면 승리가 보장되는 경쟁구도를 감안하면 일단 누가 먼저 눈길을 끄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해 라이코스가 인터넷 업체로는 최초로 엄정화를 모델로 TV광고를 내보내 급성장한 것은 ‘선점의 효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한편 능률협회의 이준엽 팀장은 “‘선점의 효과’는 기존 ‘굴뚝 산업’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컴퓨터, 가전, 자동차 등의 경우 제품의 품질차이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며 “따라서 비슷한 품질의 물건을 더욱 많이 판매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눈에 띄는 광고가 필요한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섹스 어필’광고”라고 말했다.

n세대를 겨냥하는 ‘섹스 어필’광고는 결국 디지털 경제로 휩쓸려가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인 셈이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14 19:13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