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우르르 몰려든 여학생들. “우와, TV에서 레슬링하던 그 아저씨다.”

그때까지만 해도 좋을뻔 했다. 그런데 개중 터프하게 생긴 한 여학생이 갑자기 그 아저씨를 멈춰서게 만든다. 자신감에 넘친 확고한 목소리. “아 맞어! 춘이(조춘) 아저씨다. 아저씨, 조춘 아저씨 맞죠, 그쵸?” 어디 가나 목소리 큰 사람이 꼭 말썽이다.

그도 ‘쌍라이트’ 못지 않은 빛나는 머리를 갖고 있지만 코미디언 조춘으로 보는건 피차 결례되는 오해다. 아무리 닮았다 해도 그는 정식 시합에 서는 정통 프로레슬링 선수인 것이다.


마음은 10대 몸은 20대 나이는...

본명은 김주용, 예명 노지심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키 180cm, 체중은 105kg의 거구지만 몸가짐은 사뿐하고 날렵하다. 혹시 그가 어딘가 급히 뛰어가는 모습을 본다면 그의 가볍고 재빠른 동작에 감탄할만 하다.

평균 체중 120kg을 오가는 프로레슬링계에선 오히려 왜소한 편이다. 그가 밝히는 ‘보도용 나이’는 38세. 몇해동안 써먹은 나이인지 궁금하지만 마음은 10대, 몸은 20대라는 본인은 “그저 그렇게만 쓰시면 된다”고 우긴다.

하긴 그도 인기관리를 해야될 때가 되긴 됐다. 최근 송강호 주연의 영화 ‘반칙왕’에서 ‘링 위의 헤드라이트’로 등장한데다 최근 일고 있는 프로레슬링붐으로 그를 알아보거나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많다. ‘작은 체구’가 요즘은 그래서 더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다.

노지심이란 이름은 그의 대선배이자 명실공히 국내 프로레슬링계의 1인자로 불리는 이왕표씨가 선사한 것이다.

수호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책중 인물 노지심은 의리있는 박치기 명수에다 힘도 장사인 파계승인데 과연 이름 덕을 봤는지 ‘김주용 시절’보다 훨씬 신수가 좋아졌다. 한달에 치르는 시합이 너댓번. 평균 승률 50%인데 최근엔 70-80% 수준까지 오를 때도 종종 있다.

연습장은 영등포구청 옆 한 예식장 주차빌딩 옥상에 있다. 원래는 주변의 5층 건물에 있다가 워낙 헤비급들이 몸사리지 않고 던진 충격 탓으로 건물에 금이 가버렸다. 부득이 더 탄탄한 건물을 찾아 현재의 장소로 옮겨온 것이다.

이왕표씨 얘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그는 노씨 자신보다 노씨의 이력서를 더 잘 쓸 수 있는 인물이다. 워낙 어려서부터 그를 보아왔고 이씨 자신이 그를 혹독한 훈련법으로 지도했다.

노씨의 이상하게 생긴 두 귀도 알고보면 이왕표씨가 만들어준 훈장. 왼쪽은 아마시절에, 오른쪽은 프로시절에 모양이 바뀌었다.

“이 관장님이 참 엄하고 무서웠어요. 특히 훈련을 얼마나 심하게 시키는지 수시로 매트에 깔린채 귀를 심하게 바닥에 마찰시키다보니 금새 귀가 크게 부어올랐다가 나중엔 물집처럼 되거든요. 그럼 또 주사기로 물을 빼고 다시 운동을 하는데, 그러길 반복하다보니까 귀 모양이 이렇게 되더라구요.”


김일선생은 신적인 존재

얼마전 은퇴식을 치른 한국 프로레슬링계의 거목 김일 선생은 그에게 ‘태산’이었다. 어렸을 적 흑백 TV에서 바라보던 그의 모습은 영웅 그 자체였고, 어린 그에게 프로레슬러의 꿈을 품게 만들었다.

전남 고흥의 마도라는 섬에서 7남매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강원 태백에 사는 친형에게 놀러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떠났다. 그리고 1년간 공부도 쉰 채 중국음식점 배달원 노릇을 하며 저축, 자금을 모았다.

그 돈을 들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결심을 말했을 때 처음엔 반대하던 부모님도 결국 아들의 뜻을 허락했다. 더욱이 아버지는 같은 고향사람이기도 한, 그러나 직접적으론 일면식도 없는 김일 선생에게 “내 아들을 부디 잘 거둬 가르쳐달라”는 편지를 손수 보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상경, 곧바로 김일체육관을 찾아갔다. 그때가 1977년. 주야로 학교공부와 훈련, 체육관 연습과 선배들 뒤치닥꺼리를 한꺼번에 해야 하는 힘든 신참생활이 시작됐다. 나이 열아홉, 어린데다 성질도 그리 모질지 못한 그가 그래도 끝까지 버티는 것을 보고 선배들도 용하다고 했다.

“저처럼 레슬러가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그 때만 해도 스무명 가까이 됐어요. 그런데 2-3일쯤 다니다간 다신 안 나타나는거예요. 저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덩치도 더 큰 사람들이었는데 워낙 운동이 힘드니까요. 사실 저도 고생 엄청 했어요. 하루의 절반은 학교에서 아마레슬링 훈련받고 나머지 절반은 여기 와서 연습하고. 운동만 해도 오죽 힘든가요.

그런데 여기선 빨래며 식사당번까지 다 맡은채 운동했으니까요. 나중엔 너무 힘들고 서러워서 ‘내가 왜 여기왔나’며 혼자 울기도 했지만 옛날엔 누구나 그런 과정을 거칠 때였고 어쨌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떠날 생각은 없었어요. 얻어맞을 때 얻어맞더라도 여기가 좋더라구요. 요즘 후배들이요? 아휴, 우리같이 했다가는 남아있을 놈 하나도 없게요?”


얻어터지면서도 행복했던 시절

고교시절 전국 학생선수권대회를 석권하는 등 아마레슬링 선수로 이미 촉망받았던 노씨. 그러나 프로입문 3년 뒤 1980년에 치른 첫 데뷔전은 한마디로 대참패였다. 장소는 부산 구덕체육관. 일본선수가 대결상대였다.

그러나 아무리 아마선수로 날고기던 그라도 프로의 세계는 확실히 달랐다. 링 위에 올라설 때부터 극도의 긴장감으로 앞이 캄캄해 관중이 한사람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죽 하면 경기직전 심판이 몸검사를 위해 다리를 올려보게 했는데 들어올린 다리가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리곤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을 잃도록 맞기만 했을뿐 팔 한번 제대로 뻗어보지 못하고 10분만에 경기는 싱겁게 끝났다. 데뷔전 만이아니라 그후에도 오랫동안 승률 0%를 기록한 초보 프로. 그래도 절망감이나 패배감을 몰랐다.

“그렇게 얻어터지고 졌어도 행복했어요. 맞는 것도 행복이었다니까요. 어쨌든 내가 링 위에 섰다는 거, 나도 프로선수가 되어 경기를 한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맞는 것도 실은 기술이예요. 그땐 경험이 없어서 미숙했지만 아무리 일방적으로 때리는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헛점이 보이게 돼 있거든요. 맞고 있다보면 반드시 찬스가 생겨요. 낙법이나 맞는 일이 그래서 중요해요.”

지금은 링에 올라 한번 주욱 주위를 훑어봐도 누가 어디에 앉아있는지 한눈에 ‘자동 출석체크’가 될만큼 여유만만해진 베테랑. 지금까지 400여회의 대전을 치르며 쌓은 노련미다. 그러기까지 걸핏 하면 인대가 늘어나고 어금니가 부러지고 어깨뼈가 빠지는 등 부상도 여러번 입었다.

때로는 목과 허리를 다쳐 제대로 걷지도, 밥을 먹지도 못한 적도 있다. 다쳐도 병원치료를 받아본 일이 없다. 초창기 언젠가 경기도중 오른쪽 무릎이 탈골했을 때 멋모르고 병원을 찾아가 깁스를 하고 온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후 김일 선생을 뵈러갔다가 “운동선수에게 깁스가 웬말이냐”고 벼락같은 호통만 듣고서 보는 앞에서 바로 깁스를 해체한 일이 있다.

정신력이 해이해질 것을 우려한 그들 세계의 신인 훈련법이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고 프로로서의 자격이 충분히 입증된 뒤에서야 이젠 그도 병원을 이용한다. 그래도 웬만큼 가벼운 부상은 여전히 운동을 통해 풀고 있다.


독특한 캐릭터 위해 삭발

처음엔 남들처럼 머리를 길렀으나 2년전부터 머리를 깎고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캐릭터 차별화를 위해서지만 속으론 개인적인 시련이 얽혀있다. 평소 집안 설거지도 기꺼이 맡을 만큼 자상하고 가정적인 가장으로 소문난 그지만 어쨌든 피치못하게 이혼을 한 것.

그 정신적 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택한 것이 현재의 스타일이다. 왜 머리를 깎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그가 늘 하는 대답도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일 뿐이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것은 적절했다. “머리를 깎은 뒤 박치기를 주무기로 삼기위해 훈련도 많이 했어요.

얼마나 세게 박으면 이마가 찢어지나 알아보려고 일부러 쇠로 된 링 기둥에다 머리를 들이박기도 하고, 파이프로 머리를 때려보기도 했습니다. 링 위에서 인상도 험악하게 보이게 하려고 밤마다 자기 전에 표정연습도 했죠. 훈련한만큼 효과가 있더군요.”

머리를 깎은 뒤 그도 이젠 요령껏 반칙을 하기도 한다. 반칙중 가장 악랄하고 치사한 것은 남자의 급소를 공격하는 것. 그러나 당하더라도 겁낼 건 없다. 한번 당하면 꼭 되갚아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반칙의 순리다.

“상대방의 공격의 맥을 끊어놓기 위해선 가끔 반칙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언제나 그 자신도 반칙을 당하리라는 각오를 하고 시도하는거예요. 오히려 자신이 한 것보다 몇배 더 심한 반칙을 당할거란 예상을 해야 되죠. 실제로 그렇게 되구요. 반칙은 한 사람이 꼭 되받게 돼있어요.”


프로레슬링도 세딸의 아버지도 과도기

고3 수험생인 첫 딸을 비롯, 그의 세 딸은 더이상 그의 시합을 보려들지 않는다. 맞고 다치는 아버지를 구경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 여린 세 딸의 아버지는 요즘 자신의 과도기라 생각한다.

어차피 영원한 최고란 없는 것이고 정상 그 자체보다는 오르막이 막 시작되는 그 순간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프로 데뷔 시절 얼마간을 빼놓고는 오랜 침체기를 걸어온 한국 프로레슬링. 근래에서야 뭔가 좀 돼가는 것도 같지만 이럴 때 아쉽고 긴장되는 것이 너무도 많다.

한편에선 그를 두고 만년 2인자라며 딱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본인은 오히려 무덤덤하다. 조연도 조연 나름의 역할과 성공법이 있음을 그는 믿고 있다.

의욕과 희망이 솟는 요즘일수록 누군가 마음을 기댈 사람이 다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끔씩 들지만 딸들에겐 미안해 내색도 못한다. 어쨌든 이 과도기를 잘 보내야 그의 꿈도 이뤄질텐데 말이다.

그의 꿈이란 것도 알고보면 1970년대의 복사판이지만. “옛날 어렸을 때처럼 TV엔 꼬박꼬박 프로레슬링이 중계되고 그걸 보면서 사람들마다 열렬히 환호하고, 그렇게 프로레슬링과 함께 호흡하던 시절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그때를 기다릴뿐입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14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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