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은 침략자, 약탈자, 야만인이라는 인식이 박혀있었으나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는 바이킹이 손재주가 좋은 탐험가였으며 민주주의 신봉자였음을 새롭게 확인해주고 있다.

8세기 말에 등장한 바이킹이 수백년동안 바다와 육지에서 피비린내나는 약탈을 자행했다는 시각은 크게 왜곡된 것이다. 바이킹은 활동범위가 이라크에서 북미대륙에 이르는 무역상이었고 세계 최초로 의회를 만들었으며 컬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북미대륙을 밟은 기개높은 탐험가였다.

전문가들은 바이킹의 문화와 업적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최근 유럽과 아이슬랜드, 그린랜드, 캐나다 등에서 발견된 고고학 유적을 기초로한 연구가 봇물을 이루면서 바이킹에 대한 재해석이 확산되고 있다.


뛰어난 선박건조기술

바이킹은 노르웨이인이지만 노르웨이인이 모두 바이킹은 아니었다. 바이킹은 흔히 떠올리듯 뿔달린 철모를 쓴 것도 아니었다. 약탈을 자행하긴 했지만 극히 일부분이었다. 이들은 주로 농업이나 목축을 기반으로 생활했다.

유럽인에 비해 미개했던 것도 아니다. 에다스로 알려진 바이킹 구전문학은 호머에 크게 뒤지지 않았고 길고 긴 겨울에는 주사위놀이나 체스를 하면서 보내기도 했다. 여자들은 고래뼈를 판으로 삼아 다림질이나 바느질을 하기도 했다.

남자들은 농사일뿐만 아니라 광석으로 도구를 만들고 보석을 가공하거나 신화 등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당시 최고 수준의 선박을 건조할 정도로 기술이 뛰어났다. 이들이 만든 배는 유선형으로 제작돼 기동성이 뛰어났으며 먼 바다뿐만 아니라 얕은 바다에서도 활동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인들은 처음에는 발틱해 주변에서 거래를 했으나 유럽과 영국, 러시아는 물론 로마와 바그다드, 카스피해까지 활동범위를 넓혔으며 아프리카에도 손을 뻗친 것으로 추정된다. 스웨덴의 바이킹 무덤에서는 북인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불교유품과 중동의 놋쇠가 발견됐다. 이스탄불의 하지아 소피아 성당의 바닥에는 바이킹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8세기 후반 바이킹은 귀금속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았아냈다. 그동안 거래를 해왔던 영국과 아일랜드, 유럽본토의 사원에 엄청난 귀금속이 있었지만 방어는 허술했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793년 영국의 린디스판 사원을 공격하면서 바이킹의 악명이 퍼지기 시작했다.

바이킹은 노략질을 한 뒤 달아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눌러살기도 했다. 더블린이나 링컨, 요크 등은 바이킹의 도시가 됐다. 스코틀랜드에 정착한 바이킹은 15세기까지 자기들 언어를 사용하고 본국과 정치적 관계를 유지했다.


870년경에 아이슬랜드 도착

바이킹은 서쪽으로 이동해 870년경 아이슬랜드에 도착했다. 전문가들은 가축과 함께 현지에 정착한 바이킹의 숫자가 1만2,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이슬랜드의 지배층은 930년경 주민대표들이 매년 만나 중요 현안을 토의하고 법적 분쟁을 처리하는 ‘알팅’이라는 의회를 만들었다. 알팅은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982년 알팅은 ‘붉은 에릭’이라는 성질 고약한 이민자에 관한 문제를 심의했다. 설화에 따르면 노르웨이에서 살인죄로 추방된 에릭은 아이슬랜드에서 기독교도인 토드힐드라는 여성과 결혼해 리프와 토르발드, 토르스타인이라는 아들 세명과 프레이디스라는 딸 하나를 두었다.

에릭은 여기서도 이웃과 싸움이 나서 다시 살인을 저질렀다. 알팅은 에릭을 3년간 추방키로 결정했고 에릭은 난파선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따라 서쪽으로 항해에 나섰다. 초지와 작은 버드나무 등이 있는 섬에 도착한 에릭은 이 ‘그린랜드’가 살기에 적격이라고 판단했다.

지금은 현대식 공항이 들어선 섬의 남서쪽 초목이 우거진 곳에 에릭은 농장을 만들고 부인을 위해 조그마한 교회도 지었다.

그린랜드의 군주였던 에릭은 모피나 상아수출 등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모험심을 가누지 못했다. 에릭은 아이슬랜드로 가다 항로를 잃고 헤매다 숲이 우거진 섬에 도착한 뒤 그대로 돌아온 한 선장의 이야기를 듣고 큰아들 리프와 함께 997년에서 1003년 사이에 이 땅을 찾으러 나섰다.

이들이 찾은 곳은 야생 포도가 우거진 ‘빈랜드’. 이곳에서 겨울을 난 뒤 그린랜드로 돌아왔다. 리프는 에릭이 숨진 뒤 그린랜드를 지배했으나 더이상 탐험을 하지는 않았다.

리프의 북미대륙 여행은 설화로 내려오다 1960년에 너무 간단히 확인됐다. 노르웨이 탐험가인 잉스타드 부부는 빈랜드라는 곳을 찾기 위해 1670년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지도를 근거로 뉴펀들랜드로 갔다. 잉스타드부부가 원주민에게 “이 지역에 이상한 유적이 없느냐”고 묻자 원주민들은 ‘인디언 캠프’라는 곳으로 데려갔다. 잉스타드 부부는 그곳이 바이킹 유적임을 금방 알아봤다.


뉴펀들랜드서 유물 발굴

잉스타드 부부와 세계 각국에서 모인 고고학자들은 7년동안 발굴작업 끝에 건물 흔적 여덟 곳을 찾아냈다. 또 뼈로 만든 바늘과 가위 등을 가는데 쓴 돌, 철제 보트용 못 등 북미대륙 원주민의 유물과는 전혀 다른 물건도 발굴했다.

나무조각과 뼈바늘 등에 대한 방사선 탄소분석 결과 리프가 빈랜드를 찾았던 980년에서 1020년 사이의 유적인 것으로 밝혀져 이곳이 리프가 겨울을 보냈던 곳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유물을 종합해볼 때 노르웨이인이 이곳에 머물렀던 기간은 10년이 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영구 주거용이라기 보다는 멀리 세인트로렌스만 일대까지 탐사하는 중간기지 역할을 했다.

바이킹은 그린랜드 전진기지를 몇 세기동안 유지했지만 1450년 이전에 모두 떠났다. 500년간 계속된 소빙하기가 시작돼 고대 노르웨이인이 갖고 있는 사냥이나 농업기술이 쓸모없게 됐고 추위에 쉽게 적응하지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린랜드에서 유럽에 수출하는 품목의 가격이 폭락했다. 유럽의 봉건영주가 강력한 왕정으로 탈바꿈하자 바이킹은 약탈대상을 찾기도 힘들어졌다. 1066년 노르웨이인 후손인 정복왕 윌리암에게 패배함으로써 바이킹 공포는 종말을 고했다.

바이킹에 대한 공포는 유럽을 재편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국립박물관 극지역연구소장 윌리엄 피츠휴는 “바이킹 때문에 유럽인은 서로 뭉쳐 방어하는 방안을 찾았고 이것이 유럽역사의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로 돌아와 왕국을 만들었고 이것이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로 발전했다. 호전적인 기질도 사라졌다.

정리 송용회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14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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