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각 도시에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산업이 있다. 뉴욕 하면 금융, 로스앤젤레스 하면 영화이며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엘비스 프레슬리가 난 멤피스는 음반으로 유명하고 라스베가스는 도박, 실리콘 밸리는 하이테크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에 비해 수도 워싱턴 DC는 옛부터 이렇다 할 산업이 없었다. 굳이 들자면 ‘정치 산업’이라고나 할까. “워싱턴 시내에서 양복 입고 다니는 사람 셋을 고르면 하나는 공무원이고 나머지 둘은 로비스트거나 변호사”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니 정치가 워싱턴의 유일한 산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워싱턴 지역에 새로운 산업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로 인터넷 산업이다.

인터넷 열풍을 타고 성장한 대표적인 지역기업이 바로 ‘아메리카온라인’(AOL)이다. AOL의 가입자수는 세계적으로 2,200만명에 이르러 업계 2위를 두세배의 격차로 따돌리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업계 선두주자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

그런데 올초 월스트리트에서 놀랄 만한 뉴스가 터져나왔다. 인터넷 시대의 대표주자 AOL이 전통적인 영상·인쇄 매체의 거인인 타임워너를 매수하기로 한 것이다.

합병규모 또한 엄청나서 발표 당시의 주가를 기준으로 했을 때 사상 최대인 1,600억 달러 규모. 그 때까지 가장 컸던 합병이었던 석유회사 모빌-엑슨간 거래액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규모였다.

타임워너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사주간지 ‘타임’(Time)을 발행하는 회사를 모체로 해 발달한 미디어 기업군으로 워너브라더스 영화사, CNN 방송 등을 소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 가정의 대부분이 시청하는 케이블 채널 HBO와 영화전용 채널 시네막스를 소유하고 있으며 미국 내에서 가장 가입자가 많은 유선 방송망을 가지고 있다.

타임워너의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1980년대 초 타임이 워너브라더스와 합병하여 종합 미디어군으로 몸집을 불릴 때에는 아직 AOL은 생기기도 전이었다. 이때 이미 타임워너는 벌써 미국 100대 기업 내에 들어서 있었다.

그후 AOL은 인터넷의 발달에 힘입어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으며 급기야 높은 주가에 힘입어 자신보다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는 미디어 업계의 거인 타임워너를 합병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AOL로서는 전통 미디어계의 거인 타임워너를 합병함으로써 인터넷 콘텐츠를 더욱 충실히 하고 무엇보다도 타임워너가 가지고 있는 케이블망을 통하여 케이블 가입자를 잠재적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 고객에게도 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타임워너의 입장에서도 종이 매체와 음반 및 영화 등의 전통적 미디어 산업에서 유지해왔던 강세를 인터넷 시대에 맞게 매체변환시키는데 있어서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해 월스트리트로부터 무언의 압력을 받아오고 있었던 터에 AOL과의 합병을 통하여 인터넷 미디어 부문의 열세를 일시에 만회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전문가들도 “인터넷이 보편화됨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환영했다. 어쨌든 양사는 합병을 통하여 신 미디어와 구 미디어의 만남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시장은 호의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합병 발표 직전 70-80달러를 오르내리던 AOL의 주가는 발표와 함께 떨어져 60달러 대를 간신히 유지했으며 요새는 50달러 대에서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많을 때에는 1년에 2번씩 주식분할을 거듭하여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분할전의 가격을 회복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AOL은 과거 인터넷의 선두주자로 주식시장에서 각광받는 기업은 더이상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나 지금까지는 신식 경제와 구식 경제의 결합은 기대했던 것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적어도 주식시장에서는 판명되었다.

우리 나라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신식 경제에 대기업이 앞다투어 나서고 있다.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대처해나가는 것이 경영자의 기본 책무요, 능력이다.

따라서 대기업이 인터넷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경제와 구경제의 결합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박해찬 미 HOWREY SIMON ARNOLD & WHITE 변호사

입력시간 2000/05/16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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