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시야가 닿는 곳까지는 모두 불에 탔습니다.”

강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뒷산. 임도를 따라 야트막한 구릉에 올라서자 그곳에서 더이상 산은 볼 수 없었다. 숯기둥으로 변한 나무와 그 아래로 속살 마저 불타 거무틱틱하게 색이 바랜 마사토 토양만이 취재진을 맞았다.

삼척시청 산림과 임업서기 이상준씨의 손가락을 따라 시야를 옳겨가자 경악은 분노로 변했다. 겹겹이 굽이치며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맥은 완전히 제 모습을 잃고 있었다. ‘아! 이곳이 그 푸르던 백두대간이었단 말인가….’


‘검은 사막’ 뚫고 올라오는 새순

산기슭에서 가끔 낯선 사람을 경계하듯 울던 까치소리도 중턱으로 올라서면서 들리지 않는다. 잃어버린 산을 장송하는 듯한 까마귀 울음과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 소리만 어쩌다 메아리칠 뿐 새는 더이상 지저귀지 않는다.

아직 잎이 색을 잃지 않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한두 그루 눈에 띄기는 했다. 하지만 둥치가 불에 타 조만간 죽게 된다는 것이 이상준씨의 설명이다. “소나무는 불기운만 닿아도 죽게 돼요.”

4월7일부터 15일까지 9일간 계속된 불로 1만6,751㏊가 불탄 강원 삼척시 산불현장. 영동산불 지역중 피해가 가장 컸다. 고성 2,695㏊, 강릉 1,447㏊, 울진 310㏊ 등을 포함한 총 피해면적은 2만3,448㏊. 서울 남산 면적의 78배로서 지난 19년간 발생한 산불피해 총면적을 웃돈다.

화마가 할퀴고 간지 한달이 됐지만 삼척지역의 산은 여전히 ‘검은 사막’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하늘을 향해 죽죽 뻗었던 20~30년생 소나무 숲은 숯기둥 천지로 바뀌었고 무릎까지 빠졌다는 낙옆층도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면 산은 정말 죽었을까.

계곡에는 그래도 참나무 몇 그루가 봄기운을 받아 푸른 잎을 활짝 펼치고 있어 주변의 소나무 지대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둥치가 타버린 참나무 뿌리에서는 자줏빛 여린 순이 땅을 뚫고 올라와 있다.

아카시아에서도 새 순이 돋고 있다. 활엽수는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강원대 생명과학부 정연숙 교수의 설명. “활엽수는 침엽수에 비해 수피가 두껍다. 두꺼운 수피가 안쪽의 분열조직인 형성층을 불기운으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다. 소나무 종류는 수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수피가 얇아 형성층이 쉽게 손상된다.”

활엽수만 살아남은 게 아니다. 지천으로 돋아난 취나물과 고사리에, 용케 목숨을 보전한 개미가 기어다니고 산딸기와 찔레, 고비류도 새 순을 틔우고 있다. 습기가 있는 곳에는 풀밭도 형성됐고 간간히 고개를 숙인 초롱꽃도 볼 수 있다. 푸석푸석한 마사토를 파헤치니 벌레도 눈에 띈다. 분명히 산은 죽지 않았다.


“8월께면 완전히 다른 모습될것”

정 교수는 “8월께가 되면 산불지역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눈에 띄지는 않지만 봄동안 땅 속에서 돋아나고 있는 각종 식물이 여름을 거치면서 완전히 지표로 노출돼 상당한 녹음을 이룬다는 얘기다.

죽은 소나무들이 단기적으로는 어느 정도 그늘을 형성해 보습효과를 주고 장기적으로는 양분을 공급해 살아남은 식물의 생장을 도와주게 된다고 한다.

한 교수는 산불지역의 자연복원론자다. 무엇보다 자연의 복원력을 믿기 때문이다. 산불지역이 너무 건조해 조림에 적당치 않다는 것도 인공조림에 반대하는 이유다. “산불에 취약한 침엽수림 일변도로 조림하기 보다는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해 자연이 스스로 삼림을 복원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동안 영동지역에서는 산불이 연례행사처럼 발생했다. 4월 산불진화에 동원됐던 이상준씨는 열흘간 집에 들어가지를 못했다고 한다. 빵과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차 속에서 잠을 자며 불을 껐다는 것.

삼척시 산림과 홍준표 계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매년 산불이 나면 산림공무원은 죄인이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헬기가 못뜰 정도로 강풍이 불어 진화 자체도 어려움이 컸지만 구조적인 문제도 많다는 게 그의 이야기.

“공직 구조조정으로 인원이 격감하고 여직원의 비율이 늘어나면서 산불감시와 동원이 어려워졌다. 농촌이 노령화하면서 젊은이가 줄어 산불 초동진압도 어렵다. 인접시군 직원과 민방위 대원을 동원하는데는 빨라도 1~2시간이 걸린다. 국민 개개인의 각성없이는 감당할 재간이 없다.”

홍 계장은 “산악지형과 기후조건상 대형산불의 기록이 다시 깨진다면 영동지역에서 깨질 것”이라고 말했다. 삼척지역 산불은 주민의 실화로 인해 발생했다.


피해현실과 동떨어진 보상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추천1리. 산불로 민가피해가 가장 컸던 곳이다. 동네사람이 모여 경기도의 한 장애인 독지가가 구호품으로 보냈다는 신발을 고르고 있었다.

강원도 산불피해민 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동석씨는 이 마을에서만 완전소실된 집이 15채라고 말했다. 박씨는 “주민피해 보상이 정부 발표대로 되지도 않고 전체적인 대책도 불명확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컨테이너 가옥에 임시거주하는 이경선(70)씨는 “순식간에 불이 번져 가재도구 일체를 홀랑 태웠다”고 한다. 길목에 소방차 10여대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바람에 밀린 불길이 갑자기 방향을 트는 바람에 중풍으로 성치않은 몸을 피하는데도 급급했다는 것.

불탄 집터의 재건축 현장을 둘러보던 이씨의 부인은 아직도 기가 찬 듯 “컨테이너집에 놀러와요”라며 이웃에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했다.

바닷가에서 횟집을 했던 어촌계장 이광훈(57)씨는 “가게는 물론이고 아들 결혼을 위해 준비했던 패물까지 몽땅 잃었다”며 망연자실했다. 불길이 워낙 거세 배를 타고 바다로 피난하기에 바빴다는 것.

역시 컨테이너 가옥에서 임시거처를 마련한 그는 보상대책이 탁상행정이라며 비난했다. 최고 700만원으로 일률적으로 책정된 가재도구 보상비가 피해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송이밭도 아주 절단났어요”

산불은 송이밭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송이버섯 채취 임지의 70~80%가 불탔다. 삼척지역 송이채취 농가는 약 2,500호. 이중 절반은 삼척 산림조합원으로서 대부분 채취한 송이를 공판장을 통해 출하했고 나머지는 개별적으로 판매했다.

전체 채취농가의 1년 수입은 약 70억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채취농가들은 앞으로 최장 60년간 송이채취가 어렵다고 봤을 때 최대 피해액은 4,000억이 넘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상받을 길이 막막한 비조합원들은 당국을 상대로 소송까지 준비중이다.

삼척지역의 송이 채취량은 강원도 전체의 30%에 이른다.

송이채취를 해온 김세호(56)씨는 “1,100만원을 산주인에게 주고 5년간 송이를 채취하기로 계약했는데 계약금만 날리게 됐다”며 한숨이다. 김씨의 송이채취 수입은 1997년 3,200만원, 재작년 1,200만원, 작년 1,000만원이었다.

“6·25동란 후 송이버섯이 나기 시작한지 겨우 20년인데…. 앞으로 50년 걸려야 송림이 회복되지만 그때가 돼도 송이가 날지는 알 수 없다. 쌓인 솔잎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지금 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주 절단났다.”

도시인의 일상에서 산은 어쩌다 찾는 휴식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주민에게 산은 엄청난 의미와 존재를 갖고 있었다.

글·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사진·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17 17:33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