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전대통령이 5월9일 청와대에서 만났다. 두 사람의 만남은 국민적 관심사였다. 정치권에서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듯 이날 회동이 가진 의미를 헤아리느라 바빴다.

일반 국민은 듣기 민망한 독설을 퍼부었던 당사자와 이를 들어야만 했던 또다른 당사자가 어떻게 웃는 얼굴로 악수를 할 수 있는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두 사람의 연결 고리는 6월에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민족의 큰 일을 앞두고 전·현직 대통령이 머리를 맞대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겉포장과 속내용이 다르다는 건 어지간한 국민이면 다 안다.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끌어낸 것은 서로의 정치적인 필요 때문이었다. 과연 두 사람이 그동안의 앙금을 말끔히 털어내고 진정한 화해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일까.


윈·윈게임

청와대 회동 후 청와대와 상도동은 한결같이 “만족한다”고 말했다. 청와대측이 “두 분이 공개해도 좋다”고 한 내용을 보면 ‘DJ-YS 신협력 시대’라는 분석이 나올 만도 하다. 두 사람은 민주화운동의 동지로서 앞으로도 상호 협력하기로 했고 동서 화합을 위해서도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물론 김 전대통령은 이날도 가시돋친 비판을 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목이 쉴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한다. 김 전대통령에게는 김 대통령이 이날 저녁에도 여전히 독재자였다.

야당 파괴, 지역편중 인사, 언론탄압, 정치보복, 부정선거 등을 지적하며 “(김대통령은) 불행한 대통령이 될 것이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고 쏘아붙였다.

김 전대통령은 개인적인 서운함까지 남김없이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하고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얼마나 많이 감옥에 갔나. 내 뒷조사도 계속했다. 문민정부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거침없이 퍼부었다.

김 대통령은 이에 대해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점이 있다.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김 전대통령측은 ‘사과’로 받아들였고 청와대측은 이러한 상도동의 해석에 대해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속마음이 어땠고 주고받은 말이 무엇이었든간에 이날 만남으로 두 사람은 나름대로 정치적 성과를 거뒀다.

먼저 김 대통령으로서는 취임 이후 줄곧 적대적 관계에 있던 김 전대통령이 늘 부담스런 존재였다. 김 전대통령은 끊임없이 김 대통령에게 칼날을 들이댔다. 수차례 청와대에 초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김 전대통령의 독설에 침묵을 지키기도 하고 측근이 나서서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 어느 것도 뾰족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부담 던 김대통령

그러나 이날 만남으로 김 대통령은 이 부담을 일부나마 덜었다. 자신을 비난하건 말건 국가를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손을 내미는 정치적 포용력을 국민에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현정권의 최대 고민인 지역 갈등 문제를 푸는 데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게 틀림없다.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지역주의는 현정권에 대한 부정적 정서를 확산시키고 있는 상태. 김 대통령으로서는 영남 지역, 좁게는 부산·경남의 민심을 끌어안기 위해서 김 전대통령을 한껏 감싸안는 제스처가 반드시 필요하다.

국내 정치상황과 관련해서도 적잖은 도움이 됐다. 4·13 총선으로 굳혀진 여소야대의 양당 구도는 집권 후반기로 접어드는 김 대통령에게는 고민스런 정치 지형인 게 사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주가가 치솟는 것을 마냥 느긋하게 지켜볼 수 없는 형편이다.

김 대통령은 김 전대통령과의 화해 무드를 더 짙게 만듬으로써 이 총재를 적절하게 견제할 수 있게 됐다. 전·현직 대통령의 국정운영 제휴라는 명분을 앞세워 양당 구조를 일정 수준에서 관리할 수 있는 것. 게다가 이날 만남으로 김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초당적 협력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을 뒷받침하는데 성공했다.

김 전대통령도 나름대로 쏠쏠히 정치적 이득을 챙겼다. 김 전대통령은 4·13 총선 과정에서 민국당의 끈질긴 구애를 뿌리치고 침묵을 지켰는데 이는 오히려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좁게 만드는 쪽으로 작용했다. 중립 고수가 한나라당의 부산·경남 석권에 도움이 된 것은 틀림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이회창 대세론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만들어준 것.

한나라당에 자신의 영향력이 미칠 여지가 한껏 줄어든 상태에서 김 전대통령은 이번 만남을 또다른 형태의 세복원 기회로 키워갈 수 있다. 김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맘껏 정치문제에 언급함으로써 전직 대통령의 정치 재개를 곱지않게 보는 여론을 한결 수월하게 비켜갈 수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 더해 김 전대통령은 이번 만남이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 김 대통령에게 ‘선배’로서 조언을 하는 형식이 됨에 따라 전직 대통령의 존재의 필요성을 국민에게 실감케 했다. 이렇게 볼 때 때로는 라이벌로, 때로는 협력자로 함께 한국 정치를 이끌어 왔던 두 사람이 이날은 제로섬 게임이 아닌 윈윈 게임을 펼친 셈이다.


진정한 화해 가능할까

2시간45분의, 길다면 긴 시간동안 얼굴을 맞댐으로써 두 사람은 화해를 위한 최소한의 기틀은 마련했다. 엉클어질대로 엉클어진 두 사람의 관계가 상당히 호전될 것으로 보고 있는 관측도 있다.

특히 이번 만남이 단발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만남을 예비하고 있다면 이후의 상황이 이러한 관측대로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직은 이날 회동이 새로운 정치적 제휴의 시작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재로서는 김 대통령이 김 전대통령을 현실정치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지 않고 있는 까닭이다. 총선을 계기로 한나라당에 그의 입김이 미칠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줄었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성욱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1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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