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안정과 경제난 극복을 두마리 토끼를 찾아

지난해 7월26일 오후 ‘아세안지역포럼’(ARF)이 열린 싱가포르의 만다린 호텔은 대(對)북한 성토장이었다. “우리는 지난해 8월 ‘페이로드(Payload·탑재물)’발사가 한반도와 지역 안정에 심각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고 긴장을 고조시킨데 우려를 표명한다.”

ARF 의장국인 싱가포르의 자야 쿠마르 외무장관이 낭독한 의장성명에서는 북한과 미사일이 직접 지칭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ARF 22개 회원국이 1997년 8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를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정을 해치는 최우선 현안으로 간주한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 자리엔 북한 대표단은 없었다. ARF는 1997년 북한에 가입을 촉구했지만 북한은 응답을 하지 않은 것으로 가입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난 5월 초. 2000년도 ARF 의장국인 태국의 수린 핏수완 외무장관은 북한의 백남순(白南淳) 외무상 명의로 된 우편물을 받았다.

가입 신청서와 함께 동봉된 편지에는 “ARF의 모든 목적과 원칙을 준수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북한이 자신을 비난했던 국제기구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피력한 것이다.


외교노선, 개방으로 방향 선회

북한의 이런 태도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외교 전문가들은 북한의 ARF 가입신청을 북한이 외교노선의 물꼬를 개방쪽으로 확실하게 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이해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 외교소식통은“북한이 지난해 9월 백 외상의 유엔총회 참석을 기점으로 탈고립의 외교노선이 양자(兩者)관계 개선에서 다자(多者)기구 진출단계로 진일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즉, 북한이 이탈리아와의 수교, 호주와의 복교 등 양자관계 개선 과정에서 얻은 자신감을 토대로 국제사회의 지원과 원조를 끌어낼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외교적 구상을 보다 구체화하고 있는 신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체제위협을 느낄 때마다 ‘벼랑끝 외교’를 통해 난국을 뚫고 나가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하지만 북미·북일회담, 남북 정상회담 추진 결과로 ‘외부세계의 위협’에서 벗어난 김정일 정권에겐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경제난에 따른 내부붕괴 가능성이 오히려 체제를 압박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정권은 경제난 극복과 체제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길이 바로 외부세계와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는 게 외교전문가들의 분석이다.

1994년 창설된 ARF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과 한·미·중·러 등 아·태 지역 11개국, 유럽연합(EU)의장국이 참여, 정치·안보 문제를 협의하는 아태지역내 유일한 정부간 안보협의체이다.

ARF는 1995년이후 빠짐없이 의장성명을 통해 남북대화, 4자회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지원방안 등 한반도 문제를 거론해왔다. 북한이 빠진 상태에서 의장성명은 남한의 입장을 주로 반영해왔던 게 사실이다.

이 점에서 북한은 ARF 가입을 통해 핵 및 미사일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힘으로써 한반도 안보에 대한 남한 주도적 시각을 조정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하지만 국제기구 가입은 북한에게 또다른 구속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핵·미사일 개발에 대한 회원국의 ‘우려’를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북한이 ARF가입을 주저하게 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한 외교분석가는 “ARF 가입의 이해득실을 재던 북한이 예상보다 빠르게 신청서를 낸 것은 그만큼 가입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부수효과를 크게 생각하고 있는 증거”라고 진단했다.


경제적 실리 택한 외교노선

경제적 실리는 그 부수효과의 대표적 예다. 물론 ARF는 안보협의체이기 때문에 북한에 실질적인 경제 혜택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ARF라는 국제무대를 통해 아·태 국가들과의 양자관계를 보다 활성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파급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북한이 의도하는 보다 직접적인 효과는 아시아개발은행(ADB),아·태경제협력체(APEC), 세계은행(IBRD) 등 경제금융기구에 가입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있다.

북한에 있어 ADB 등 경제기구는 빈곤탈출과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위한 돈줄을 의미한다. 북한이 ADB에 가입할 경우 최빈국(A그룹)으로 분류돼 35~40년만기 연 1~1.5%의 초저리 자금인 ‘아시아개발기금(ADF)’을 융자받을 수 있게 된다.

국제금융 관계자들은 북한이 ADB에 가입할 경우 1억~2억달러를 당장 지원받을 수 있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한 외교전문가는 “이러한 재원확보를 위해 ADB 등 경제기구 가입에 방해가 되는 장애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려는 계산이 ARF의 가입을 촉진시키는 동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국제기구는 경제난의 구원처

특히 북한의 ADB 가입은 남한이 남북 정상회담의 모멘텀을 살려가기 위해 북한의 가입을 적극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이미 수면 위로 부상한 상황이다.

이헌재 재경부장관은 지난 5월7일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열린 제33차 ADB 연차총회에서 “ADB 등 국제기구가 북한이 국제금융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혀 북한의 ADB 가입을 측면지원하고 나섰다.

물론 북한의 ADB 가입이 남·북한의 의도대로 진행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우선 각각 ADB 출자지분의 13.2%를 차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의 동의를 얻어야 하지만 미국은 북한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되기 전까지는 북한의 국제금융기구 가입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일본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하지만 현재로서는 북한의 ADB 가입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 북미회담, 북일회담 등 한반도를 둘러싼 세가지 대화의 틀이 계속 가동,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는 한 북한의 ADB 가입은 멀지않아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경제난 타결을 최고의 선결과제로 삼고 있는 만큼 미국과 일본의 요구하는 조건들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북한이 11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미국과 일본이 우리의 ADB 가입을 반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비난한데서 역으로 추론할 수 있듯이 경제난의 구원처로 국제기구에 참여하려는 북한의 움직임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는 양상이다.

김승일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0/05/17 19:46


김승일 정치부 ksi8101@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