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금융구조조정의 핵심은 부실 투자신탁회사 정리와 은행합병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부가 대한투신과 한국투신에 5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부실 투신사 처리는 이미 확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은행합병은 여러가지 설만 무성할 뿐 구체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은행 구조조정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만 확산되면서 주가는 연일 하락하고 있다.
은행 구조조정의 필요성
정부와 금융전문가들은 은행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은행합병이 불가피하다고 말하고 있다. 국민은행 한빛은행 등이 국내에서는 대형은행으로 꼽히지만 세계에서는 100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규모를 키우지 않으면 외국 금융기관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논리다.
이기호 경제수석이 최근 40조원의 공적자금을 추가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국내 은행은 합병을 해도 잘해야 세계에서 50위권이나 70위권에 불과하다”고 언급한 것도 이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조건 합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시장규모에 비해서 은행수가 너무 많다는 점에는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예금보호제도 축소에 먼저 대비하기 위해 은행합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예금액 2,000만원까지만 보장하는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면 부실은행은 자금이 빠져나갈 수 밖에 없는데 이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은행간 짝짓기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은행들이 인터넷 뱅킹과 전자금융을 확대하기 위해 정보기술(IT) 발전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는 것도 과잉투자라는 주장도 있다. 올해 1,000억원 이상 IT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계획을 잡은 은행은 주택(1,605억원) 조흥(1,472억원) 한빛(1,363억원) 국민(1,285억원) 등이다. 시중은행 전체로는 올해 1조원 이상을 투자할 예정이다.
은행이 떠안고 있는 부실채권 처리문제를 시급히 해결하려면 공적자금을 집어넣어야 하는데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은행합병과 구조조정이 전제돼야 한다는 논리도 합병 시나리오의 근거가 되고 있다.
현재 시중은행의 부실여신 규모는 35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정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은 한빛은행 조흥은행 외환은행의 경우 전체여신중 부실여신이 차지하는 비율이 지난해 말 16%를 넘어섰다.
부실여신→수익성 악화→주가 하락→대외신인도 추락의 악순환 고리를 차단하기 위해 부실채권을 매입할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하고 이를 위해 은행합병은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합병 시나리오 난무
시중에 나돌고 있는 은행합병의 시나리오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일부에서는 정부가 은행합병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놓고 시장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흘리는 게 아니냐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다.
첫번째는 정부가 대주주인 한빛·조흥·외환은행간 합병 가능성이다. 하반기에 금융지주회사법이 제정되면 곧바로 이들 은행간 합병이 가시화될 것이라는 추측이다. 정부보유지분을 하나의 금융지주회사로 모으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이들 은행간 합병이 성사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다.
그러나 부실채권을 그대로 둔채 합병하는 것은 ‘수퍼 부실은행’만 탄생시킨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한빛·외환·조흥은행의 부실채권은 지난 3월말 기준 25조원을 넘어선다. 부실채권을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서는 추가로 8조~10조원을 투입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은 재무구조가 상대적으로 튼튼한 우량은행간의 합병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두 은행이 합치면 총자산 130조원이 넘고 일부 외국투자자들도 바람직한 합병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두 은행이 소매금융 위주로 업무성격이 비슷하고 중복점포가 많기 때문에 합병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반대론도 만만치 않다. 김상훈 국민은행장과 김정태 주택은행장이 합병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 직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금융연구원 최흥식 부원장은 “비슷한 규모의 은행이 합치는 대등합병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신한·하나·한미 등 후발은행간의 대통합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기업금융과 소매금융을 동시에 취급하고 업무스타일이 비슷한 은행을 통합시키면 경쟁력을 갖춘 대형은행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기대다.
그러나 합병당사자인 은행들이 반발하고 있고 정부가 합병을 성사시킬 만한 지분도 없어 현실성은 희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외국인 지분이 많다는 점도 합병의 부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국민·주택은행이 신한·한미·하나은행과 개별적으로 손잡을 가능성도 있다. 소매금융에 강점이 있는 은행이 기업금융을 강화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나오는 얘기다.
그러나 지난해 초 국민은행과 장기신용은행간의 합병이 기대했던 것만큼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합병대상으로 거론되는 신한·한미·하나은행은 이같은 소문이 나도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
은행합병의 성공조건
시중에 나도는 소문만으로는 내일이라도 당장 합병이 이루어질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성사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진통도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은행합병의 필요성에 대한 일치된 공감대가 없다.
지난 1998년의 경우 상당수 은행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고 정부가 당장 공적자금을 넣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강제적인 퇴출과 합병 없이는 금융시스템이 붕괴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국가 전반에 팽배했다.
반면 최근 논의되는 은행합병은 정부관료 금융전문가 은행경영자마다 하는 얘기가 다르다. 은행의 경쟁력을 선진금융기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은 장기간에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 금융구조조정의 대상은 아니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합병을 촉진할 만한 여건도 갖춰지지 않았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정해왕 금융연구원장은 “시장을 통한 구조조정을 추진하려면 은행간 M&A가 가능해야 하는데 현행 법규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은행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합병을 먼저 선언하고 제도를 바꾸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노동조합과 주주들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다. 지난 1998년에는 국가부도위기의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은행원들이 한꺼번에 퇴출당했지만 지금은 엄청난 반발이 예상되고 있다. 경제가 회복되는 국면에서 인력 구조조정이란 매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이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은행 합병을 단행하려면 상당한 위험이 뒤따를 수 밖에 없어보인다.
입력시간 2000/05/17 19:53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