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파견 근로자 상당수 실종, 정부 생사확인 '방기'

베트남 전쟁에선 국군만 실종된 것이 아니었다. 현지에 파견된 우리 기술자들도 전쟁 중에 감쪽같이 사라진 사람이 적지않다.

서울대 전경수 교수(인류학)가 최근 공개한 미국 국방부 비밀문서는 전쟁 중 포탄을 피해가며 달러를 벌었던 기술자들이 포로로 잡히거나 실종돼 사라진 사실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는 베트남 전쟁포로(POW) 및 실종자(MIA) 발생 자체를 부인해온 정부의 공식입장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미국 당국은 실종된 한국 민간인에 대한 조사를 전쟁이 끝난지 7년후인 1982년 8월까지 진행한 것으로 문서는 밝히고 있다.

한국 정부가 전쟁이 끝난뒤 방기한 이들에 대한 소재파악 노력을 미국 정부가 대신한 셈이다. 한국은 전쟁 당시 외화 획득을 위해 건설노동자 등 수만명을 베트남에 파견했고 이 과정에서 300여명이 이국땅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경우 민간인 실종도 군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POW/MIA로 취급하며 베트남 현지에서 확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민간인실종자 첫 언급

문서에 언급된 민간인은 민경윤 김수근 이길용 이창훈(이상 ㈜세신), 김흥삼(발전기술자), 김성모(냉장고기술자·이상 한양건설), 신창화 채규창씨 등 총 8명이다.

특히 1967년 1월20일~1970년 11월15일 사이에 실종된 이들 8명 중 신창화씨 등 5명은 포로(POW) 신분으로 분류돼 신원확인 작업이 요구된다. 민간인 실종자의 존재가 언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문서는 전 교수가 지난 1994년 7월 미 국방부에서 POW/MIA 문제를 전담하는 포로실종자 방어국(DPMO)으로부터 확보한 것으로, 전쟁 당시 한국 대사관과 주월 한국군 사령부의 실종보고와 미군의 정보활동 등을 통해 작성된 것이다. 20쪽 분량의 문서는 미 국방부의 자체 분석과 각 실종자에 대한 개인 정보 파일로 구성됐다.

문서에 따르면 민씨 등 ㈜세신 직원 4명은 1967년 1월20일 포로가 돼 다른 지역으로 이송됐다고 당시 한국대사관이 1973년 5월8일 미국측에 전했다. 이들에 대한 수색은 실패, 현재까지 포로로 분류돼 있다.

한양건설 기술자였던 김씨 등 2명은 1968년 6월26일 포로가 된 후 남베트남에서 월맹군에 의해 숨진 것으로 기록됐다. 채씨는 1968년 1월28일 실종된 후 신원확인이 안된 것으로, 신씨는 1970년 11월15일 투옌 둑 성(省) 들랏 남쪽 19㎞ 지역인 동둥군 인근에서 실종됐다고 당시 한국대사관이 미국측에 알렸다.

신씨는 ㈜세신 직원과 마찬가지로 현재까지 포로 신분이다. 채씨는 1968년 1월28일 실종된 후 신원확인이 안됐다.

전쟁 당시 한국기업 및 민간인의 베트남 진출은 ‘골드러시’를 방불할 정도였다. 1965년 기술자 93명이 월남행을 한 이후 1966년 1만20명 등 많을 때는 2만명이 넘었다. 이들은 대부분 세탁 군복 시계 카메라 수리 등 주월 미군과 각종 서비스 계약을 맺고 외화벌이에 나섰다.

한진 현대 경남기업 대한통운 대림산업 등 5개 건설회사는 베트콩의 테러위협을 무릅쓰며 군수시설을 지은 결과, 일약 대기업으로 도약했다.

특히 ‘월남상사’로 불렸던 한진상사(현 한진그룹)는 군수물자를 베트콩이 우글거리던 정글을 뚫고 실어날라 ‘해상수송’을 고집하던 미군측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우리 기술자들은 월맹군 혹은 베트콩의 타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생사 알수없는 8명의 민간인

월남이 패망한 1975년 4월30일 이후에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이윤경(56·호치민 교포)씨는 ‘살아돌아온 실종자’다.

이씨는 1975년 3월27일 철강선적을 위해 동료 고모(55)씨와 함께 베트남 중부 퀴논을 방문했다가 월맹군이 도시들을 하나둘 장악해오자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한국 대사관은 이들을 수배했으나 실패하자 결국 실종처리했다. 공산 월맹이 지배하는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신분을 속이고 월맹기를 흔들어야 했다.

월맹군의 사격을 받으며 구사일생으로 남부 도시 나트랑까지 가는 배편을 탄 그는 정글을 헤쳐 500㎞를 걸어 5월7일 마침내 사이공에 도착했다. 하지만 월남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씨는 다행히 사이공 함락후 ‘적성국 시민’으로 억류된 160여명의 한국인 그룹과 합류했고 1980년에야 귀국했다.

이씨는 살아돌아왔지만 미 국방부가 공개한 문서에 소개된 8명은 그야말로 ‘생사를 알 수 없는’ 한국인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특히 미 국방부는 1982년 김성모 김흥삼씨 등에 대한 자료를 베트남측에 제공, 조사해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베트남측은 이들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 정부는 전쟁 중 실종된 후 자국에 남은 한국인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간인 신분인 이들이 살아있다면 1992년 수교 후에라도 구조요청 등 귀국했을 수 있으나 이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더구나 미 국방부가 공개한 문서는 일부에 불과하다. 과연 이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베트남·이동준 국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1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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