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 미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 쇼어에 있는 한 회사. 직원들은 서둘러 퇴근하고 있지만 몇명의 여성은 2층에 있는 임원실에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최근 법과대학원을 졸업한 마리안 반겔더는 “내일이면 나는 1,000만달러를 손에 쥐게 된다”고 흥분했다. 불과 5년전만 해도 사람들은 반겔더가 돈많은 아버지와 만나는 줄 알겠지만 사실 그녀는 안왕 엔터프라이즈라는 벤처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이 날 2차 공모가 예정돼 있다.

이날 회의는 캘리포니아에 본부를 둔 산마타오사가 후원한 ‘여성기업인 포럼’과정 중의 하나. 신경제체제의 여성은 활발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포럼의 기획자인 데니스 브로소는 “우리는 여성이 손톱미장원이나 가기 보다는 세계 500대 부자를 뽑는 ‘포춘 500’에 선정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미국 경제계의 구도를 조금씩 바꿔놓고 있다. 지난 10년간 여성이 창업한 회사는 미국 전체의 38%를 차지하고 있다. 전국 여성기업가 재단(NFWBO)에 따르면 1987년이후 여성이 창업한 벤처사는 450만개에서 910만개로 거의 두배 가까이 늘었다.

여성이 소유한 기업은 한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됐지만 최근 3년동안 직원수와 수입면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말 현재 이들 기업의 직원은 전년보다 900만명이 늘어난 2,700만명에 이르고 매출액도 2조3,000억달러에서 3조6,000억달러로 팽창했다. 재단 사무국장 샤론 해더리는 “가정주부가 그저 부업이나 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인터넷세대여성 대거 경제계 유입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진 데는 인터넷 세대의 여성이 대거 유입된데 힘입은 바 크다. 젊고 대담하며 기술력을 갖춘 이들은 일반기업에 들어가 승진경쟁에 매달리기기 보다는 스스로 최고경영자가 돼서 사업계획을 펼칠 수 있는 창업을 선호하고 있다.

하버드 경영대 미라 하트 교수는 “지금의 경제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여성에게 유리하게 조성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터넷의 확산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인터넷 혁명은 처음에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강한 반도체와 장비산업에 집중됐으나 3년전부터 여성들이 강한 마켓팅과 소비자지원 분야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자수성가한 여성 기업가들이 언론에 부각된 것도 여성의 창업을 부추기고 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에 근무하면서 특허를 5개나 취득한 크리시나 수브래머니언(29)은 지난해 새너제이에 전자상거래 고객을 관리하는 코바이르라는 회사를 공동창업했다.

그녀는 “이제 여성이 대기업을 경영하면 뭔가 잘 될 것같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말했다. 시스코시스템스의 영업담당 부회장 출신인 캐더린 머더(52)는 지난해 첨단기술분야 여성창업만 도와주는 최초의 인큐베이터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인터넷 분야에 뛰어드는 여성 창업자들이 가장 취약한 재정적 연계망을 구성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단 창업이 이뤄지고 직원수가 30명선에 이르면 독립하게 된다. 지난 6개월간 이미 4개가 독립했다. 인큐베이터사는 그 대가로 시가총액의 2%를 받게 된다.


여성사업가 차별에 적극대응

여성기업가 포럼 등은 여성기업가의 진출을 막는 가장 큰 장벽인 벤처자금 유치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스프링보드 2000’을 열었다.

버팔로에서 토지조사회사를 경영하는 데보라 네이보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겪은 뼈저린 경험을 이야기했다. 여성기업가를 믿지 않았던 거래은행측이 그녀에게 30일내에 7만달러를 갚으라는 통보를 한 것이다.

은행의 경우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여성은 여전히 벤처투자가들을 끌어들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스톤대학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지난해 약 200억달러에 달하는 벤처투자자금 중 불과 4%만 여성기업에 투자된 것으로 나타났다.

시카고의 벤처투자가인 소나 왕이 5년전 일리노이주 에반슨에 건강 및 기술분야 여성회사를 겨냥한 최초의 펀드를 설립하고 유사한 펀드가 5, 6개 잇따라 설립됐지만 전체 벤처투자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인맥으로 연결된 벤처 투자업계의 속성도 여성의 접근을 쉽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 때문에 캐더린 머더는 유망한 여성벤처 박람회를 매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그녀가 50만달러에 이르는 비용을 댔으며 ‘스프링보드 2000’에서 300여개 기업중 27개 기업을 엄선, 225명의 벤처투자가에게 자신의 영업계획 등을 설명했다.

3개월 뒤 이중 26개사가 1억달러에 달하는 투자금을 끌어들였으며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는 등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행사는 올 가을 워싱턴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계속될 계획이다.

지난달 뉴욕에서 열린 ‘실리콘 앨리 여성 정상회담’이라는 비슷한 성격의 행사에 참여한 파멜라 클라이어는 “여성에 대한 차별 뿐만 아니라 남부인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닷컴의 세계에서는 지역차별도 무시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석사를 학위를 받은 메넥스 겐서는 졸업후 한 컨설팅회사에 자리를 잡았으나 지난해 10월 그만두고 대학동창 2명과 함께 비스티파이라는 인터넷 상거래 회사를 창업했다. 그녀는 “회사 고위간부가 된 여성이 너무 비참해보였다”고 말했다.

여성창업은 대규모 이직을 의미한다. 컨설팅회사인 델로이트 앤드 터치의 경우 여성이직율이 남성의 두배에 이르자 승진규정과 가족휴가 정책을 완전히 다시 만들었다.

일부에서는 기업내에서 여성에 대한 부당한 처우가 여성이직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겐서의 생각은 다르다. 그녀는 “회사 내에서 고위직에 오른 여성의 성공담은 우리에게는 어색하게만 들린다. 오늘날 젊은 여성은 자신의 능력 뿐 아니라 어디에서 승부를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창업 활발해질 전망

경영학석사와 첨단기술분야 학위를 가진 여성이 점점 늘어나면서 여성의 창업은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하바드 경영대는 첫 여성졸업자가 탄생한지 34년만인 1997년 전체 졸업자의 39%를 여성이 차지할 정도다.

자금유치에 성공하더라도 여성기업가들은 회사를 성장시키는 것 외에 아이들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종업원 3명을 데리고 인비전넷이라는 회사를 창립한 헤더 블리스(37)는 종업원수가 1,500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회사를 키우는데 전력을 다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막 커가는 아이때문에 이중고를 겪었다.

한번은 투자금 유치문제로 서부로 여행을 갈 때 둘째 아들이 “엄마는 나보다 회사를 더 사랑해?”라고 물어 괴로워했다.

여성기업가는 쉽게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소프트웨어시스템 제작회사인 아스크 그룹 창업자 산드라 커트직(59)은 창업초기 어머니에게서 “네 아들이 홍역에 걸렸는데 어떻게 회사를 갈 수 있냐”고 잔소리를 들은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국 그녀는 일 때문에 이혼까지 하게 됐다. 그러나 커트직은 이제 사회에 막나온 젊은 여성에게 “남성과 마찬가지로 희생을 감수하는데 주저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정리 송용회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5/18 17:47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