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⑨] 광주(下)

무등산 충효동 가마터

무등산 자락의 충효동 가마터로 가는 양쪽 길섶에는 개나리와 산수유가 노랗게 피었다가 지면서 지나는 길손에게 아쉬움으로 내년을 기약하고 있다. 철따라 곱게 피는 형형색색의 꽃은 무등산의 온갖 영욕을 감싸주기 때문에 광주사람은 특별히 이 길을 사랑한다.

무등산 문화권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심도식 사장이 충효동 가마터와 담양의 루정과 원림유적지 답사에 동행해주었다. 오랫만의 만남이었지만 첫 인사가 바로 4·13 총선 결과였다.

“말로는 우리 모두 영호남 화합을 외쳤지만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행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우리나라는 각종 종교가 가장 흥한 나라인데 왜 그들 교인은 한결같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느냐?” 그 말에 대해 기행자는 아무 답변도 못하고 무등산만 바라보았다.

임진왜란 때의 전설적 명장 김덕령 장군의 얼이 서려있는 충장사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충효동 가마터가 자리하고 있다.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의 학술발굴 조사결과 가마터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가마터는 복원되었고 서편부지에는 전시관이 아담하게 건립되어 이곳에서 출토된 각종 분청, 백자 그리고 찻그릇 도편을 전시하고 있다. 도자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가마터의 지표조사다.

기행자도 옛 가마터를 찾아나서는 일은 이제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말았다.

때로는 신들린 사람처럼 남도의 이름모를 옛 가마터를 찾아 심산유곡을 헤매면서 옛 사기장인의 고운 영혼이 깃들인 찻그릇 도편을 채집하여 누옥초당으로 돌아오면 주변 사람으로부터 “허구한날 돈만 써 가면서 가치도 없는 무거운 사금파리를 주어와서 공부와 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적잖은 질책을 들어왔다. 그렇다고 당장 훌륭한 연구성과가 나오는 일도 아니다.

광주 충효동 가마터가 최초로 학술조사된 것은 1963년 6월 국립중앙박물관 발굴조사단(단장 최순우)에 의해서였다.

당시 충효동 가마터가 있는 구릉지역을 발굴해본 결과 고려 말기 청자와 조선 초기 분청 및 백자에 이르는 다양한 사금파리의 퇴적층이 발굴되었다.

충효동 무등산 기슭에는 지형상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여러곳에 가마터가 운영됐던 것으로 보인다. 1991년 6월과 7월에 걸쳐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서쪽 지역을 발굴하였을 때도 분청사기와 백자 도편이 많이 발굴됐다.

학계에서도 충효동 가마터에 관한 관심이 대단해 국내외 학자에 의해 논문과 저서에도 소개가 되었다. 충효동 가마터는 우리나라 15세기 도자사의 흐름에서 볼 때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이행되어가고 있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한다.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의 말기상감과 조선초의 소략된 인화문에서 발전했고 다시 귀얄문으로 이행되어 점차 분청사기 표면은 백자같은 백색으로 이행돼 갔다.

고려문화의 전통에 조선문화의 새로운 요소를 과감하게 수용, 전혀 새로운 생활문화를 창조했던 분청사기는 이 과정에서 익살스럽고 생동감있고 대담하고 활달한 기형과 문양이 함께 백색의 표면에 흡수돼 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충효동 가마터에서 많이 발견되는 광(光)자 명문 도편을 볼 때 조선 초기에 걸쳐 점차 중앙에 공상하는 가마에서 광주지방의 관아나 향교에서 사용하던 그릇을 굽던 곳으로 바뀌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곳 충효동 가마에서 구워진 일부 분청사기 찻그릇은 영산강 뱃길을 따라 중세 일본의 국제무역항인 사카이지방 상인의 사무역에 의해 오사카의 화려한 차회에 등장하게 됐던 것이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05/2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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