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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학살, 면죄부 받았나

사실로 드러난 민간인 사살, 과거청산 필요

“백명의 적군을 놓친다 하더라도 단 한명의 민간인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중장) “적에게 용감하고 무서운…그러나 월남인에게 예의바르고 친절한 따이한이 되자”(주월한국군 참전 3훈)

“한국군이 단 한방의 총성을 들으면 인근 마을 주민 90명이 목숨을 잃었다”(베트남 피해자)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운다. 놓치는 것보다는 오인사살이 낫다”(참전 국군 증언)


돌아서는 할머니

베트남 중부 광나이성(省)의 ‘디엔니엔’ 초등학교 운동장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비석이 서있다. 대형 추모비에는 ‘1966년 9월10일 남조선 군대에 의한 희생자’라는 제목아래 112명의 이름과 나이가 새겨져 있다.

4월 22일 1번국도 선상에 있는 광나이 시내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20㎞ 떨어진 이 시골학교를 방문했을 때 베트남 어린이들이 운동장 한켠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어린이는 비석을 가리키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어른들에게 청룡부대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디엔반현(縣) 디엔증사 하미마을에서는 5월 2일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이사장 김문구)를 주축으로 한 33명의 한국 대표들과 지역 주민들이 모여 전쟁희생자 위령비 기공식을 가졌다.

주민들은 전쟁 당시 청룡부대원들에 의해 137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맹호부대가 주둔했던 퀴논 인근 길거리에서 만난 ‘마이’라는 노점상 할머니는 망고 바나나 등 과일을 내놓다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듣곤 인상을 찌푸리더니 팔지않겠다고 돌아섰다.

할머니는 “한국군이 집 마당에 여우굴(땅굴)이 있다는 이유로 온 가족을 죽였다”며 몸서리를 쳤다.

1965년부터 맹호부대가 주둔하다 1966년 말부터 백마부대 28연대가 맡았던 투이호아에서 1번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조금 달리다 왼쪽으로 꺾으면 다다르는 푸옌성은 한국군에 의해 여러 마을이 거의 몰살당했다.

“한국군 한명이 죽거나 다치면 인근 마을은 줄초상이 났지. 그놈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폭탄구덩이에 몰아넣고 총을 쏴댔지. 그놈들 앞에서 줄행랑을 쳤다간 엄청나게 맞은뒤 죽어야 했어.” 봉타우 마을에서 만난 웨잉투욤(66) 할머니는 “이 지역에서만 7,8개 마을에서 500명 이상 숨졌다”고 증언했다.


공식적 양민학살건수 3,000건

양민 학살은 사실이다. 청룡부대 주둔지인 다낭에서 한국군야전군사령부가 있던 나트랑까지 600㎞에 이르는 ‘따이한’ 작전 지역 곳곳에 민간인 피해가 널려 있다.

베트남 문화통신부에서는 불완전한 통계라는 전제 아래 한국군에 의해 양민 5,000여명이 숨졌다고 보고 있다. 전쟁 당시 베트콩의 외교부장으로 나중에 파리협상에도 참가했던 구엔 티 빈은 70년대 초반 비동맹 회의에서 한국군의 ‘공식적’ 양민학살 건수가 3,000건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심지어 미군이 저지른 양민학살 사건도 한국군과 연관시키고 있다. 미 육군 군사학센터가 발간한 ‘군과 미디어, 1968~73년’은 “1967년 한국 용병들이 밀라이 지역에서 숱한 양민을 해쳐 주민 사이에 증오감을 남겼다”면서 “이 유산이 미군에 전수됐다”고 적고 있다.

소대장 윌리엄 캘리 중위 등 미군이 1968년 3월16일 동료의 시신이 참혹하게 난도질 당한데 분노, 밀라이 등 손미 지역 양민 504명을 학살한 것이 미군에 앞서 이곳에 주둔했던 청룡부대의 가혹한 평정작전으로 인한 민심이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민간인 피해는 한국군의 작전 방식과 관련이 많았다. 1968년 ‘구정공세’를 기점으로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에서 베트콩과 월맹으로 넘어갔다.

이 무렵 웨스트모얼랜드 미군 사령관은 기존의 ‘색적섬멸’작전과 함께 게릴라의 근거지인 자연 취락을 분쇄하고 새로 ‘전략촌’을 만들어 민간인들을 수용해 놓고는 그 바깥은 광범위한 ‘자유살상지역’으로 설정했다.

이때부터 밀라이 사건, 쾅트리 사건 등 양민학살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됐다. 전략촌 바깥에 걸어다니는 모든 것은 자유로운 살상의 대상이 돼 버린 셈이었다. 물론 채명신 한국군사령관은 미군측 전략에 대해 강하게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국군은 이미 이같은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참전소대장들 민간인사살 증언

최근 청룡부대 참전소대장들은 인터넷 전문뉴스 ‘오마이뉴스’를 통해 민간인 집단사살과 강간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청룡부대 2대대 6중대 1소대장으로 참전했던 최우식(59)씨는 “악이 돋칠때는 개새끼까지 모조리 없애 버린 적이 있다”면서 구체적으로 “1966년 5월14일께 푸옌성 투이호아현에 있는 푸헵마을 주민 ‘20여명 이상’이 집단으로 사살됐다”고 말했다.

베트남 당국은 이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46명이 학살된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또 청룡부대 2대대 5중대 1소대장이었던 정우식(59·서강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씨는 소대원 중 베트남 여성을 강간한 사례가 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전쟁 당시 ‘제도권’내에서는 미국 언론의 무관심과 한국 군부의 언론 통제 때문에 ‘미확인’으로 남았다. AFP 통신 등이 1969년 10월 한국군이 남부 판랑지역의 린선사 스님 4명을 사살한 사건을 보도, 국제적 문제가 된 적이 있으나 점차 흐지부지해졌다.

하지만 미군철수를 요구해온 미국 좌파와 민간단체들은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도 실태조사를 했다.

뉴욕타임스 기자였던 제임스 애런슨이 쓴 ‘베트남 주둔 한국군 용병’이라는 제목의 1973년 논문에 따르면 1966년~69년 사이 한국군의 양민학살과 관련된 3건의 조사 보고서가 미국 정부에 전달됐다. 뉴욕타임스는 1970년 1월10일자에서 래리 람보 등 버지니아주 소재 인간과학연구소(HSR) 연구원 3명의 현지 실태조사 내용을 소개했다.

이들은 1967년 ‘푸옌지역 피난민 보고’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미 국방부에 제출했으나 문건은 즉시 ‘비밀’로 분류됐다. 미 국방부는 상원의 탈출·피난민 소위원회에서 보고서 제출을 요구했으나 거부했다.

미국의 주요 민간 국방연구센터인 랜드 연구소도 한국군 양민학살을 조사했다.

연구원 프란시스 웨스트는 1970년 1월12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군 만행 관련 보고서가 국방부에 제출됐다”면서 “그러나 이는 미국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랜드측의 보고서는 푸옌과 빈딘 지역 6개마을에서 벌어진 한국군 만행 사건을 담고있다.

미 정부에 전달된 마지막 보고서는 1971년 10월 국무부의 “포린 서비스 저 널’에 소개됐다. 존 마크스라는 미국 외교관은 “국무부내에서 1967~70년 한국군이 자행한 전쟁범죄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진행했다”면서 “그러나 이상하게도 쉬쉬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1970년 7월 ‘플레이보이’지도 이 문제를 다뤘다. 미국 정보장교인 제시 프랭크 프로쉬는 1968년 3월에 일어난 광나이성 송미마을 사건을 고발했다. 그는 “한국군 해병대(청룡부대)는 1967년말 이 지역에서 700명 이상의 베트콩을 섬멸했다고 보고했으나 사망자 대부분은 민간인들이었다”고 밝혔다.


민간인피해 소부대작전서 발생

“한국군은 지난 8년간 적 사살 4만1,462명, 포로 4,633명 등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측도 전사 3,844명의 피해를 봤다.

아군전사 대(對) 적사살 비율은 1대11이다.” 제2대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이세호 중장은 철군이 완료된 1973년 3월15일 수원공항에서 열린 귀국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한국군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게릴라전에서 ‘1당10’의 전과를 올린 셈이다.

그러나 한국군의 전과 보고는 한국을 제외한 세계 어느 언론도 곧이 곧대로 믿지 않았다. 1972년 10월9일 뉴욕타임스의 크레이그 휘트니 사이공 특파원은 주월한국군사령부에서 열린 전황브리핑을 다녀온뒤 “한국군은 민간인을 죽여놓고 적을 사살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면서 “‘오후의 바보짓거리(Five-o’clock follies)’를 그만두라”고 적었다.

미군이 철수하는 마당에 한국군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용맹성’을 자랑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했기 때문이다.

민간인 피해는 대대적인 작전이 아니라 주로 중대나 소대와 같은 소부대 단위의 매복 수색 정찰때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전사인 ‘파월한국군전쟁사’(1985년)에 따르면 주월사를 비롯하여 3개 전투부대(맹호 백마 청룡)와 1개 군수지원부대(십자성), 1개 군사원조단(비둘기), 2개 수송전대(백마 은마) 등 8개 부대는 1964년 7월18일부터 1973년 3월23일까지 대부대 작전 1,174회와 소부대 작전 57만6,302회 등 총 57만7,476회의 작전을 실시했다.

이 중 소부대 작전은 대부분 베트콩 소탕전이었다. 이 과정에서 게릴라들의 기습을 받은 한국군이 민간인에 대해 ‘보복성’ 공격을 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국군은 전술책임지역 7,000㎢ 내에 무려 난민 120여만명을 관리했다.

그렇다면 한국군의 행위를 광기와 반이성으로만 몰아붙여야 할까. 베트남전은 ‘전선 없는 전쟁’이었다. 베트콩은 어디에도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다.

“아기를 업은 새댁이 갑자기 광주리에서 수류탄을 꺼내더니 국군을 향해 던졌다”는 참전용사의 증언 처럼 한국군은 살아남기 위해 총부리를 겨눠야 했다. 참전용사의 대부분은 ‘물(양민) 반, 고기(베트콩) 반’인 지역을 ‘평정(Pacification)’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로 이점 때문에 6·25 전쟁때 미군이 저지른 노근리 사건과는 다르며, 양민학살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피해규모 확대·과장 주장도

피해규모가 확대 과장됐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숙명여대 최동주(국제학) 교수는 “한국군은 시종일관 선무공작의 대상이 됐다”면서 “당시 한국 참전을 반대했던 미국 좌파학자들의 현지 조사를 보더라도 최근 일각에서 주장하는 피해규모는 과장됐다”고 말했다.

더구나 한국군 전사자 5,000여명 중에는 양민 복장을 한 베트콩에 의해 희생된 장병도 상당수 포함돼 있는데다, 베트남측 일방이 주장하는 피해자들이 베트콩이 아니라 민간인이라는 점이 입증되지도 않았다.

특히 참전 용사들은 양민학살 문제가 한국군이 펼친 각종 대민사업 까지 호도해서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한국군은 참전기간 중 대민진료 352만3,364명, 식량1만9,640톤, 의류 46만1,764점,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 132개, 도로 394㎞, 태권도 보급 90만2,060명, 경로 및 어린이 잔치 6,848회, 연예 공연 2,304회 등 평정사업과 동시에 많은 대민 사업을 펼쳤다.

베트남 정부도 ‘당장 확인도 안되는’ 이 문제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 호치민의 한 언론인은 “한국 언론의 한국군 학살 보도를 인용한 ‘투오이쩨’ 등 일부 신문에 대해 보도자제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정부는 이 문제가 자칫 민족감정을 자극, 자국의 제2위 투자국인 한국과의 관계발전에 찬물을 끼얹을까 우려하고 있다. 더구나 베트남은 이 전쟁을 ‘부도덕한 미국과의 전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한국 태국 호주 등은 그저 ‘미국의 추종자’로 보고 있다.


애매한 책임소재

그러나 베트남전 특유의 상황논리나 베트남 정부의 소극적 입장이 한국에 면죄부를 주진 않는다.

최근 국제법의 추세는 민간인 피해에 대해 점점 엄해지고 있다.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협정’(1948년8월12일)에서는 교전 당사국내의 외국인 또는 점령지역내의 주민은 점령국 안전에 유해한 행동을 하지 않는한 보호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1977년 ‘1949년 제네바 협약에 대한 추가 및 국제적 무력충돌 희생자 보호에 관한 의정서’는 민간인 여부가 의심스러울땐 민간인으로 간주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전쟁중 민간인 살해 등은 ‘인도적인 문제에 관한 죄’에 해당돼 개인적 책임을 묻는 게 불문법이 됐다. 최근까지도 2차 세계대전 독일 전범들이 재판을 받았다.

문제는 베트남 양민학살 행위의 국제법적 책임귀속이 어느 국가에 있느냐는 것이다. 국군은 남베트남(월남)이 스스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소위 ‘자유세계군사원조기구’에 소속돼 베트남의 지휘를 받았다.

이는 국군이 베트콩과 교전과정에서 저지른 양민학살의 책임이 월남 정부에 속한다는 말이다. 결국 월남은 망했기 때문에 그것을 흡수 통일한 북베트남(월맹)이 그 책임까지 고스란히 인수, 사실상 민·형사상 책임이 소멸했다.

더구나 한국군은 미국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았다는 이유로 베트남은 물론이고 미국으로부터도 ‘용병(Mercenaries)’으로 취급받았다.

그렇다고 한국이 ‘도덕적’ 면죄부 까지 받은 것은 아니다. 지금도 ‘디어헌터’식 죄책감에 시달리는 참전용사가 있을 지 모른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피의 대가’로 경부고속도로를 닦고 화력발전소를 세운 사실을 잊는다면 ‘도덕 국가’가 될 수 없다.

전쟁 당시 사이공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였던 안희완씨는 “이 문제는 캄보디아를 공격, 수많은 민간인을 살상한 베트남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 “양국간 우호증진 만이 유일한 과거청산의 길”이라고 말했다.

베트남이동준 국제부기자 djlee@hk.co.kr

입력시간 2000/05/2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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