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망대] 버티는 현대, 앓는 금융시장

정부의 잇단 안정화 대책으로 진정국면을 맞는 듯 하던 금융시장이 예기치 못한 ‘현대 쇼크’를 맞아 휘청거리고 있다. “예고된 악재는 악재가 아니다”는 증시 격언도 거함 현대의 유동성 위기라는 메가톤급 태풍 앞에서 보잘 것 없이 무너졌다. 현대쇼크가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구나 지난 5월28일 밤 현대가 내놓은 자구계획안에 대해 정부와 채권단이 ‘계속 협의’를 전제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지만 양측의 힘겨루기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여 주가 환율 금리 등 주요 시장지표가 현대에게 완전히 ‘인질’로 잡힌 양상이다.

현대의 태도에 따라 이들 지표가 청룡열차와 같은 급등락 장세를 연출할 것이라는 얘기다. 특히 왕회장 주변의 ‘인적 청산’과 알짜배기 계열사의 ‘물적 청산’이 정부의 핵심요구인 까닭에 현대의 항전도 길어질 전망이다.


주가 곤두박질, 금융권 ‘준공황’ 상태

사실 지난 25일 현대가 금감위의 주문을 받아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분정리와 유동성 확보를 위한 2조원 규모의 사업축소 계획을 밝혔을 때만 해도 현대는 호재였다. 기업구조 조정에 재차 박차를 가하는 총대를 현대가 짊어졌다는 해석도 나왔다.

하지만 다음날 현대건설과 현대상선이 심각한 단기 유동성 문제를 겪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데 이어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이 두 회사의 당좌대월 한도를 각각 500억원씩 늘려줬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오비이락격으로 정몽헌 회장이 김경림 외환은행장을 방문하는 장면도 포착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올들어 외국은행을 시작으로 국내외 금융권이 현대 발행 회사채와 기업어음의 차환을 중단하고 있다는 루머가 사실로 치부되면서 제2의 대우사태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공포감이 주식시장을 덮친 것이다. 그 결과 주가는 하룻만에 폭락세로 돌아서 13개월전 수준으로 되돌아갔고 원달러 환율도 1,140원대에 육박하는 ‘준(準)패닉’상태가 연출됐다.

하지만 현대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이는 단지 비극의 시작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요컨대 부실한 금융시스템과 불건전한 기업지배 구조, 취약한 정부의 조정기능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현대문제를 맞아 거의 배신감에 가깝도록 증폭된 이상, 시장의 신뢰회복 여부가 금주의 최대 화두다.

정부가 다소 무리한 측면을 감수하면서도 정 명예회장의 지분포기와 완전 퇴진, 가신 3인방(이익치 현대증권회장, 김윤규 현대건설사장, 김재수 그룹구조조정위원장)의 퇴출, 현대전자 등 우량 계열사 매각 등 고단위 처방전을 제시한 것도 그만큼 현상황을 위험스럽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자금시장 경색국면 지속될 듯

따라서 금주 경제기류는 정부의 ‘현대 길들이기’와 몸집을 앞세운 현대의 버티기가 어떻게 결론나느냐에 따라 요동칠 수 밖에 없다. 주말과 주초에 걸친 협상에서 정부를 대리한 채권단과 현대는 다소 한발씩 물러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 굴복에 따른 충격을 최소화하겠다는 계산도 내비쳤지만 최종 잣대는 역시 시장이 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단타매매에 절대적 자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극심한 변동폭이 연출될 금주 증시는 잠시 잊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다만 주초 금융시장이 생각했던 만큼의 폭락장세를 보이지 않은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 투신사의 비과세상품 허용, 뉴욕증시의 메모리얼데이 휴장에 따른 완충, 단기 낙폭과대에 따른 가격메리트 등등의 요인과 현대사태가 어떻든 해결의 접점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감의 반영인 듯하다.

자금시장의 경색국면도 현대의 종속변수로 전락했다. 현대사태 발발에 이어 새한그룹의 워크아웃 신청이 거부되자 시중에는 벌써부터 “다음은 어느 어느 기업 차례라더라”는 흉흉한 소문과 살생부가 나돌고 있다.

4월 경상수지는 IMF관리체제 이후 처음으로 적자로 돌아섰고 근로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노동계는 본격적인 6월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금융권 구조조정을 위한 각종 법안을 처리해야할 개원국회가 제대로 열릴지도 불투명하다.

녹음은 푸르다못해 검은 색까지 띠어가는데, 우리 경제를 둘러싼 먹구름은 더욱 짙어만 간다. 이른바 ‘정부 지배구조’(Sovereign Governance, Government Governance)의 결함과 취약성을 재차 점검할 때다.

이유식 경제부 차장

입력시간 2000/05/3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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