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연방정부와 주정부

5월16일자 워싱턴포스트의 머릿기사를 보자. 대법원이 ‘여성 폭력 피해 방지법’(Violence Against Woman Act)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는 내용이다. 5대4로 나뉘어진 이 판결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버지니아테크(Virginia Polytechnic Institute)의 한 여학생이 두 명의 미식축구 선수한테 기숙사에서 성폭행을 당하자 학교에 징계를 요청했다. 징계위원회는 처음에는 혐의를 인정하는 듯하다가 몇 차례의 조사 끝에 결국 아무런 징계를 하지 않았다.

피해자는 지방경찰에도 고소하였으나 역시 무위로 돌아가자 여성 폭력피해 방지법에 따라 연방법원에 제소했고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가게 됐다.

미국에서는 이런 사건은 원래 주법원의 관할이다. 연방법원은 연방법에 정한 경우에만 관할권을 가지며 일반 경찰권은 각 주가 갖고 있으므로 살인, 절도, 성폭력 등의 일반 범죄는 원칙적으로 각 주법원에서 심리하게 된다.

그러나 1994년 연방의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인한 피해가 상당히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각 주정부가 마약 등 다른 범죄처럼 심각하게 대처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 가해자가 주경계를 넘어서 피해자를 공격한 경우에는 성폭행이나 가정폭력도 연방범죄로 규정하는 입법을 한 것이다.

의회는 각 주 사이에서 일어나는 통상을 규율할 수 있다는 헌법규정을 근거로 이러한 입법을 한 것이다. 여성이 성폭력이 두려워 밤에 외출을 못하거나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지 못해 경제적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면 이는 결국 ‘주간통상’(州間通商)에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의회가 틀렸다”고 판단한 것이다.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의회가 제정하는 모든 입법은 헌법이 부여한 권한에 기초돼야 한다”라고 전제, “성별에 기인한 범죄행위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경제행위라고 할 수 없다”라면서 위헌이라고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인 샌드라 데이 오코너 판사도 다수 의견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안토닌 스칼리아, 안토니 케네디 및 클레런스 토마스 등 대법관이 동참했는데 이들 5명의 대법관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파로서 지속적으로 연방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연방정부의 권한과 주정부의 권한의 범위를 놓고 끊임없이 대립해왔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을 건설할 때 13개의 식민지가 각각의 국가로 독립할 것인지, 아니면 구대륙과 맞서기 위하여 그 당시로서는 새로운 개념인 연방을 구성할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우여곡절 끝에 연방제로 미 합중국이 탄생하였으나 초기 연방정부의 권한은 극히 미약했다. 주정부와 연방정부간의 갈등은 마침내 남북전쟁으로 폭발하게 된다. 노예해방 전쟁으로 알려진 남북전쟁의 뿌리에는 연방과 주간의 갈등이 있으며 남부의 주정부들이 자신의 권한을 침해하는 연방정부에 반발하여 연방으로부터 탈퇴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결국은 북군의 승리로 연방제도가 공고하게 되었으며 연방정부의 권한은 20세기에 들어와 대공황을 겪으면서 더욱 강화됐다. 연방정부가 각 주의 고유한 권한에 간섭하면서 가장 많이 원용된 헌법규정이 바로 ‘연방이 각 주간에 일어나는 통상을 규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60년대의 수많은 인종차별금지 법안은 바로 이 규정으로부터 제정된 것이었다.

우리는 접하는 미국은 주로 백악관과 의회가 있는 워싱턴이다. 물론 우리에게 밀접한 영향을 주는 군사, 외교 및 통화를 연방정부에서 관할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워싱턴의 연방정부가 최대관심사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방과 주의 대립이라는 또하나의 렌즈로써 미국을 들여다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은 50개의 주가 모여있는 연방으로, 각 주는 연방헌법으로 양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분야에서 독립된 국가와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박해찬 미 HOWREY SIMON ARNOLD & WHITE 변호사

입력시간 2000/05/3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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