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태, 어디까지 가나] 정씨 3부자 정말로 물러나나

동반퇴진 발표, 시장분위기는 '반신반의'

옛부터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가리켜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불렀다. 즉 뛰어난 인재가 자신의 재주를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주머니 속의 뾰족한 추’처럼 세상 사람을 완전히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5월31일 현대그룹은 비록 그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낭중지추’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발표를 내놓았다. 바로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구·몽헌 회장 등 정씨 3부자가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에 책임을 지고 동반 퇴진한다는 발표였다.

이날 정 명예회장은 김재수 현대그룹 구조조정위원장이 대독한 친필 각서에서 “세계적 흐름과 여건을 감안하면 각 기업이 독자적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는 것만이 국제 경쟁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며 “따라서 본인과 정몽구·몽헌 회장은 경영에서 물러나고 정몽헌 회장은 남북경협 사업에만 전념한다”고 밝혔다.

현대는 또 자구계획안으로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현대전자, 현대상선 등 주력 회사를 포함해 모든 계열사에 대해 해외 선진기업과의 합작 등을 통한 전략적 제휴를 추진해 지배구조를 글로벌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밖에도 현대그룹은 각 계열사가 보유하고 있는 타회사 주식과 부동산 등의 매각을 통해 총 5조9,000억원의 장·단기 유동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소나기 피하려는 궁여지책" 불신 여전

그렇다면 핵심 경영진 3명의 동반퇴장에 대한 전문가와 시장의 반응은 어떨까. 한마디로 말하면 전문가와 시장은 겉과 속이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요컨대 겉으로는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이지만 속으로는 ‘과연 약속이 지켜질까’라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정씨 3부자’의 퇴진에 대한, 겉으로 드러난 시장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다. ‘정씨 3부자’의 퇴진사실이 발표되고 처음으로 열린 6월1일 주식시장에서는 현대그룹 계열사의 주가가 초강세를 보였다.

현대증권, 현대엘리베이터는 상한가까지 치솟았고 인천제철,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고려산업개발, 현대상선 등 주요 계열사의 주가도 모두 10% 이상씩 상승했다.

현대그룹 유동성위기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정부와 금융권의 반응도 환영 일색이었다.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은 “정 명예회장이 사태해결을 위해 용단을 내렸다”며 크게 반겼으며 금융감독위원회 역시 “이제야 현대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현대그룹이 용단을 내렸다’고 평가한 전문가들의 솔직한 생각은 “정씨 일가의 퇴진을 믿을 수 없다”로 요약된다.

심지어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어느 모로 살펴봐도 현대그룹의 발표는 당장의 소나기를 피하려는 궁여지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요컨대 현대그룹의 5월31일 발표는 ‘뾰족한 추를 품은 주머니’처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는 것이다.


MK 반발, 형제간 갈등 재연 여지 남겨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같은 전망은 불과 3~4일만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즉 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 동생인 몽헌 회장과 함께 퇴진할 것으로 알려졌던 몽구 회장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몽구 회장측은 5월31일 “몽구 회장의 퇴진은 사전협의 없이 구조조정위원회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라며 이를 즉각 거부했다.

또 정 명예회장이 직접 정몽구, 몽헌 형제를 불러 자신의 뜻을 전달한 이후에도 “다시 수용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6월1일에는 소위 ‘MK’(몽구 회장의 영문 이니셜)라인으로 알려진 이계안 현대자동차 사장 등이 이사회를 열어 몽구 회장의 재신임을 결의했다.

그렇다면 몽구 회장은 왜 세간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아버지의 결정에 반항하는 것일까. 몽구 회장측은 ‘정씨 3부자 퇴진’은 현대자동차의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몽헌 회장측의 음모라는 입장이다.

몽구 회장측에 따르면 비록 정몽구 회장(4%)이 개인 자격으로는 현대자동차의 최대 주주이기는 하지만 법인 최대주주인 현대정공(7.8%)과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분(6.9%)까지 감안하면 최대주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힌 상태가 아니다.

몽구 회장측의 한 관계자는 “이번 발표에서 몽구 회장은 완전히 물러나는데 반해 몽헌 회장은 대북사업을 계속 맡기로 한 것은 결국 현대자동차의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의도로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도

이제까지 소유 경영자들이 제발로 걸어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도 ‘정씨 3부자 동반퇴진’의 순수성을 의심케 하는 단서다.

실제로 50여년이 넘는 한국의 기업사에서 기업이 쑥대밭이 될 정도로 망하지 않는 한 스스로 물러난 경영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1966년 9월22일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소위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여론이 악화하자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는 동시에 모든 사업활동에서 손을 떼겠다고 발표했다.

이 회장은 당시 장남인 맹희씨에 경영권을 물려줬으나 여론이 잠잠해지자 2년만인 1968년 전자산업 진출을 이유로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정주영 명예회장도 잠정적 은퇴와 복귀를 거듭한 경력을 갖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1992년 대선 직후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3년여만에 복귀, 대북사업을 추진했으며 비록 중견그룹이기는 하지만 대림그룹 이준용 회장도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넘겨준뒤 다시 복귀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정씨 3부자’의 동반퇴진 발표로 현대그룹에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올해로 86세인 정 명예회장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이미 은퇴할 때이며 당초 자동차 부문으로 독립할 예정인 몽구 회장도 자기 몫은 지킨 셈이다.

사실 현대그룹은 유동성 위기가 터지기 전부터 6남1녀에 달하는 정주영 명예회장 자녀들이 자동차(현대자동차·몽구), 유통(금강개발·몽근), 건설·전자(현대건설, 현대전자·몽헌), 중공업(현대중공업·몽준), 보험(현대해상화재·6남 몽윤) 등으로 계열분리를 추진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씨 3부자’동반 퇴진은 자칫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 재계 일부의 시각이다.

그 때문일까. “2~3년안에 몽헌, 몽구 회장이 제자리로 복귀할 것”이라는 한 전문가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철환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6/06 17:32


조철환 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