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10)] 고흥(上)

소박한 미의 전형이며 중세 한일 찻그릇 교류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덤벙분청 찻그릇의 고향, 한반도 막내 땅에 위치한 전라남도 고흥을 기행하기에 앞서 기행자와 몇몇 동행자 사이에 재미있는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의 주제는 그렇지않아도 병들어가는 우리 사회에 최근 흥미를 넘어 충격을 던져준, 미모의 무기중개상 린다 김이란 사람을 아름다운 우리나라 찻그릇의 유형에 비쳐보면 어떤 유형에 속할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한 동행자는 “지난 5월8일자 한국일보 1면을 통해 보도된 린다김의 생생한 사진을 보니 그녀는 청자형도, 분청사기형도, 백자형도 아닌, 한 이름 모를 타국의 찻그릇형인 것 같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린다 김이 무슨 찻그릇의 아름다움에 비교가 되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 “그녀의 미는 1회용 종이컵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또다른 한 동행자는 “그 정도면 일제 초기에 유행하던 왜사기 찻그릇 정도는 되지 않느냐”고 “잘 좀 봐주자”고 했다.

이처럼 미와 미인을 보는 기준은 그 시대와 그 사회 환경, 그리고 보는 사람의 안목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나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린다 김을 서구의 관능적인 미를 갖춘 미인이라고 격찬하고 있다. 그녀는 분명히 보는 사람에 따라 미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마 적지않은 사람이 그녀의 세련된 매너, 옷맵시, 화려한 화술 그리고 임기응변에 이끌려 그러한 난장판에 출현하고 만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미인은 반드시 아름다운 영혼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미를 보는 기준이 자꾸만 천박한 형식미에만 치우쳐 가고 있다. 형식이란 곧 우리나라 불교미술에서 말하는 ‘장엄’(莊嚴)과 통한다. 장엄이란 외적으로 진리를 장식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장엄이 진리추구의 수단이었을 때는 ‘진장엄’(眞莊嚴)이 되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가장엄’(假莊嚴)에 많이 물이 든, 중병에 걸린 상태다. 어쩌면 천박한 산업자본사회의 비극적인,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즉, 정신이란 존재는 생각하지 않고 추악하게 장식된 형식에만 관심을 가지다보니 이러한 가장엄이 판을 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꾸만 린다 김과 같은 비상(非常)한 유형의 미인을 양산하는 비상한 사회가 되어갈 때 우리 사회는 ‘미의 버그 현상’으로 인해 국가적으로도 커다란 위기에 빠질 것이 자명하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존재와 형식이 잘 조화를 이루었을 때 실현된다는 진리를, 기행자는 고흥군 덤벙분청 찻그릇 가마터를 찾아나서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이다.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덤벙분청 찻그릇 가마터가 최초로 발견된 시기는 1973년이었고 1984년에 문화재 관리국 지표조사에 의해 이 가마터의 성격이 일부나마 밝혀져 전라남도가 도기념물 1호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16세기 일본 차회에 이토(井戶) 찻그릇과 함께 미의 사제(司祭)로 등장한 고비키(粉引) 찻그릇의 고향이 구전(口傳)을 통해 조선의 남도 지역의 보성(寶城) 부근이라는 설이 제일 유력하였다.

그래서 일본의 차인들은 덤벙분청 찻그릇의 이름을 부를 때 반드시 일본말로 호죠(寶城)라는 지명을 맨 앞에 넣어 부르게 된 것이다.

일제 초기부터 일본의 찻그릇 콜렉터들과 도자기 학자들은 호죠고비키(보성 덤벙분청 찻그릇) 찻그릇의 고향을 찾아 보성지역과 인접해있는 고흥 일대를 뒤지기 시작, 마침내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가마터가 무차별 도굴당했다.

또 많은 덤벙분청 찻그릇의 도편이 오늘날까지도 일본으로 반출되는 비극을 겪고 있는 사실에 대해 기행자와 동호인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계속>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06/0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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