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탈북자출신 보험설계사 이애란

안경 너머 눈물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애써 표정을 흐트리지 않으려 힘겹게 웃었다. 무엇이 그녀를 울게 하는 것일까.

그만 하면 성공한 여성이다. 보험설계사 이애란(36)씨. 1997년 10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의 품을 찾은 탈북 여성.

작년 4월 삼성생명 보험설계사로 입사해 근무 1년여만인 지난 5월 우수설계사에게 주는 연도상 대상을 수상할 만큼 세일즈의 두각을 드러냈고, 지난 4월에 받은 봉급과 수당만 1,000만원대에 이를 만큼 소득도 남부럽지 않다.

5월만 해도 혼자 2억1,000만원의 보험계약을 유치, 이제 황금기에 올라선 그녀가 무엇이 답답해 아직도 눈물을 막지 못하는 것일까.


“그동안 너무힘들었어요”

“작년 어느날 아침 출근을 하려는데 두 돐이 지난 아들이 너무 매달리기에 할 수 없이 몇대 때려주고 겨우 떼놓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활동을 나갔다가 심한 모욕을 당했습니다. 어느 사무실에서 공손히 인사하고 용건을 말하려는데 냅다 사람들 앞에서 ‘시끄럽다. 얼른 나가라’며 창피를 주고 거의 쫓아내다시피 하는 겁니다. 그보다 더 심한 소리도 이미 숱하게 들었지만 그날따라 아이까지 때려서 떼놓고 나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그 사무실 복도를 걸어나오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걸 겨우 참고 보험자료용 앙케이트도 받을 겸 가까운 포장마차를 찾았는데 제 표정을 본 주인여자가 따스하게 건네는 몇마디 말에 결국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한참동안 펑펑 울었습니다.

북한에선 북한대로 출신 성분이 나쁘다고 고초를 당했는데 정작 남한에선 남한대로 멸시를 받으며 살다니요. 저희가 여기에 온 건 밥이나 얻어먹자고 온 게 아닙니다. 돌이켜 보면 새 인생을 배우느라 그렇게 된거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영업분야 중에서도 가장 힘들기로 소문난 것이 보험사 영업이다. 아직도 보험이란 ‘생돈 빼앗기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태반이라 보험설계사에 대한 인식이나 그들에 대한 일반인의 박대도 예상치 이상이다. 이씨 스스로도 “인생 수도를 하려면 굳이 절까지 갈 것 없이 보험회사로 오라”고 말할 정도.

그럼 왜 이씨는 그 일을 택했을까. 그녀는 이 직장을 얻기 전에도 몇가지 ‘3D 직종’을 거쳤다. 7개월간 일련의 조사를 받은 뒤 처음엔 통일부의 주선으로 호텔 룸메이드로 취직했다. 다른 룸메이드들이 그녀를 조선족으로 생각,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만 떠넘기며 골려주는 바람에 하루 20-30개의 화장실을 청소하고 받은 월급이 50만원이었다.

한달 버스요금 10만원, 집세 20만원을 내고 생활하기에도 벅찼지만 뭣보다 암담한 것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어떤 험한 일이든 감내하려던 각오에도 불구하고 17년이나 일한 룸메이드의 월급이 고작 65만원이란 사실을 알고나자 한달만에 미련없이 나왔다.


“벌지않으면 먹지도 않겠다” 이 악문 생활

다시 통일부를 찾아가 다른 직장을 추천해달라고 매달렸다.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부탁과 확인을 거듭한 결과 어렵사리 모 정부출연기관에 추천을 받았다.

하지만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후 그녀가 받은 대답은 면접이나 출근일자 통보가 아니라 “탈북자 출신이라 받지 않겠다”는 싸늘한 거절이었다.

“너무 기가 막히더라구요. 왜 면접 조차 보려들지 않느냐고 묻자 어차피 쓰지도 않을 사람인데 면접을 봐서 뭐하냐는 겁니다. 이게 이 땅의 탈북자 대접인가, 3일동안 엎드려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내 운명의 주체는 나’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려면 내가 더 주체적으로 살아야 되는 건데 내가 바보였구나. 왜 그동안 바보같이 통일부에만 매달리고 있었을까, 직접 일어서기로 했습니다.”

스스로 살 길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소위 피라미드 회사도 다녀봤고 신문배달도 했다. 한때 한 보험회사에 찾아갔다가 사은품을 나눠주는 걸 보고 그 무렵 TV뉴스에서 보던 이상한 사기상술에 걸리는게 아닌가 공연히 제풀에 겁이 나 돌아나오기도 했다. 생활은 피폐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 남한에 온 후 받은 정착금은 아기를 데리고 있다는 사정을 감안받아 2,000만원. 그중 1,000만원은 17평짜리 임대아파트를 얻는데 보증금으로 냈고 남은 1,000만원은 최후의 보루 삼아 적금을 든 뒤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어떻게든 직접 벌어 생계를 해결하기로 하고 ‘벌지 않으면 쓰지도 먹지도 않겠다’며 악으로 버텼다.

그 지루한 생계와 취업의 싸움 막바지에서 보험설계사로 취직했다. 지하철에서도 상식책을 들고 공부해가며 시험을 친 뒤 얻은 자리. 그러나 입사후 오히려 그녀의 인생관 자체를 부수고 들어오는 태풍을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낯설디 낯선 생면부지의 땅. 찾아간 사람마다 걸핏하면 면전에서 멸시를 하거나 험한 욕설을 던지기 일쑤였다. 특히 유난히 자존심이 강한 그녀로선 상처가 더 깊을 수 밖에 없었다.

북한에서 살던 당시에도 어려서부터 자아비판 시간마다 흔히 주위로부터 지적받던 것이 ‘거만하고 지나치게 도도하다’는 것. 사실상 자신을 도도하게 만든 나름의 근거는 충분히 있었다.


월남가족 박해 못견뎌 탈북

학창시절 항상 우등생 반열에 있었고 가정형편도 윤택한 편이었다.

평양에서 태어나 4남매의 장녀로 자란 그녀는 모든 학생이 선망하던 외국어대학 중등반 모집 선발시험때도 자신이 속한 학년 전체에서 1, 2위를 다투며 당당히 합격했고 20여개 중학교 전체를 대상으로 한 혜산시 수학소조에서도 여학생 10위권내, 남녀종합 25위 이내에 들던 최상위의 우등생이었다.

또 김일성대학에서 실시한 수학경시대회에서도 전체 4위를 기록하는 등 북한 정권의 탄압만 아니었다면 여성 엘리트로서 탄탄대로를 걸었을 어린 재원이었다.

그러나 예정돼 있던 외국어대학 입학 한달 전, 조부모가 월남한 사실 외에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가 과거 기독교단체에서 김일성 퇴진 운동을 했던 이력이 갑자기 불거지면서 당의 본격적 압박이 시작되었다.

입학을 목전에 둔 채 갑작스레 온 가족이 시골 깡촌으로 쫓겨났다. 닷새나 차를 타고 가서야 도착한 새 이주지는 해발 1400여m의 첩첩산중에다 한번 눈이 오면 무릎이나 허리까지 묻히는 아득한 오지였다.

그 힘겨운 생활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녀에게 정규대학 진학의 길이 완전히 막혔다는 것. 출신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입학기회 자체가 원천봉쇄당한 것이다. 자신보다 열등한 점수로도 쉽게 대학에 입학하는 친구들을 보며 그녀는 결국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음독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다.

농약을 마시고 늘어져있는 것을 요행히 때마침 집에 돌아온 어머니가 살려냈다. 이후 마음을 고쳐먹고 취직시험에 응시, 북한 내에서도 고급 직장에 속하는 과학기술위원회에 취직해 13년간 다녔다.

원하던 대학공부도 차선책으로 통신대를 통해 병행해나갔다. 좋은 직장 덕분에 가정형편도 중류층 이상, 대학생 친구도 누리지 못한 상대적 부의 만족감 속에서 ‘성분 콤플렉스’도 상쇄되는가 했다.

그러던 중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닥쳤다. 아버지 문제가 어느 책자에 실리면서 사태가 급박해졌다. 탈북에 나선 가족은 모두 9명. 이씨의 부모와 4남매, 그녀의 아기와 동생의 아기, 올케 등 친정쪽 가족이 대부분이었다. 탈북 한해 전 결혼한 남편과 생이별한 것도 이 때다.

남편은 현재 북에 있는 상태. 친정쪽의 탈북계획이 사전에 새나갈 위험 때문에 부득이 남편에게조차 비밀에 부쳤다. 그리고 출발이 임박한 뒤 비로소 털어놓으려던 날 밤, 그 마지막 기회조차 그날따라 만취한 남편이 인사불성으로 들어와 자는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남편·고향 가슴에 묻고 살죠”

남편도, 고향도 가슴에만 묻은 채 빈 몸으로 떠나왔다.

‘만약의 경우 수포로 돌아가 내가 죽게 되더라도 제발 아기만은 무사히 살려달라’는 기도가 한국 도착 직전까지 내내 공포와 함께 맴돌았다. “그렇게 가진 것까지 다 버리고 생명까지 걸고 찾아온 저희에게 그나마 자존심 말고 이제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보험설계사로 나서보니 마지막 남은 최소한의 자존심까지 밟히는 겁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몰래 울고 들어와 차라리 미국으로 가야하나, 절망하다가 ‘어쩌면 내게 새 인생을 가르치려는 경험인지 모른다. 그동안 그렇게 혼자 우쭐대고 살더니 지금 그것을 고치게 하려고 이런 훈련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게 달라보였어요. 혼자 자존심만 세워봤자 나만 상처 입고 나만 다친다. 차라리 어떤 몰상식한 사람이 아무리 함부로 말을 뱉더라도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넓은 마음으로 수용해버리면 된다.

그가 막말을 하는 건 그 사람의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되는 것뿐이고 나는 더 너그럽게 받아들여버리자.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게 편안하더라구요. 사실 그렇게라도 달리 극복할 방법이 없었기도 하구요.

조금씩 뒤를 돌아보니 사실 제 자신이 서툴러서 초반에 고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하나둘씩 깨닫게 됐어요. 심리학, 경영학에 관한 책도 많이 보면서 이젠 세일즈의 요령이 많이 생겼지만요.”

아직도 하나뿐인 아들을 종일 놀이방에 맡겨야 하는 여성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냉대의 시간 속에서도 오히려 용기를 북돋워주며 선뜻 고객이 되어준 한 목사의 100만원짜리 보험과 그외 많은 남한 사람의 따뜻함을 그녀는 아직 가슴 사무치게 간직하고 있다. 3, 4만원짜리든 기백만원짜리든 이씨에겐 단순한 보험계약서가 아니다. ‘이애란, 당신을 믿는다’는 증서처럼 그녀에겐 보인다.


통일되면 컬러TV 몇대 사들고 고향땅에...

매일 아침 5시면 일어나 자정 넘어 잠이 드는 그녀는 전날도 어김없이 잠이 모자랐는지 어딘가 얼굴이 까칠해보였다. 바쁜 생업문제로 현재는 쉬고 있지만 숭실대 대학원에 입학, 국문학 석사과정 2학기까지 마친 휴학생이기도 하다.

요즘도 아들이 매달릴 때면 성인자녀를 대하듯 그녀는 냉정하게 타이른다. “엄마는 돈을 벌어야 해. 네가 붙잡으면 나는 우리가 쓸 돈도 벌 수가 없어.”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벌써부터 하버드 대학을 꿈꾸는 총명한 아들을 남들만큼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열심히 돈을 벌고 싶다.

언제가 될진 몰라도 통일의 그날이 오면 컬라 TV 몇대 사들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 꿈이다. 그녀는 이제 더이상 울지 않는다. 남한뿐 아니라 세상 그 어디에 내던져진다 해도 이제는 웃으며 살 자신이 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0/06/0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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