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싱가포르서 날아온 승전보, 145수만에 불계승

이윽고 오후 5시에 이르자 싱가폴에서 날아온 마지막 팩스가 드르륵 소리를 낸다. 기보였다. 한국기원에서는 마른 침을 연신 넘겨가며 더디게 모습을 드러내는 팩스용지를 사정없이 잡아당기며 읽어내려갔다.

“해냈다! 이겼다! 대한민국 만세! 145수만에 불계승입니다.” 이역만리에서 날아온 운명의 기보 한 장은 공개해설장을 발칵 뒤집고 만다. 함성, 흥분, 열광, 만세, 박수. 그리고 방성통곡….

“아, 조훈현이 해냈습니다. 장합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어찌 여러분의 바둑사랑을 잊겠습니까. 너무 기뻐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군요.” 해설장에서 200여 청중에게 바둑인을 대표하여 김수영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고 덩달아 손수건을 꺼내야했던 청중이 수십을 넘어선다. 감격의 바다였다. “조훈현”을 연호하는 함성은 끊이질 않고….

같은 시각 싱가폴. 무지개의 한쪽 끝을 기어코 잡고야 만 소년의 꿈이 실현된 그 현장. 차라리 비장하고 엄숙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외길 승부의 한길을 걸어온 이 사나이가 적수를 만나고 그 적수와의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 마침내 승리로 장식한 그 현장.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눈을 부시게 만든다.

조훈현도 갑자기 엄습해오는 행복 덩어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울그락 불그락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네웨이핑은 울분을 삭이기 힘든 표정이었고 그의 아내 공상밍도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음바다를 주도했지만 조훈현은 밀려드는 공허함으로 인해 그런 사사로움을 감지할 여력이 없었다.

조훈현은 승자의 환호에 앞서 30년 바둑인생의 정점에 올랐다는 기쁨과 벌써부터 모락모락 피어나는 공허함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가 동시에 머리 속을 다투고있었다. 네웨이핑은 슬퍼했어도 조훈현은 그리 환호작약 일색은 아니었다.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는 것이 이런 것이리라.

“한글도 제대로 깨치지 못했을 적에 바둑돌부터 잡았던 나. 9세에 프로가 되어 험하디 험한 승부의 세계로 떨어진 나.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 땅에서 한국인임을 명심하고 일본인들과의 한없는 씨름으로 단련된 나.

20세에 고국을 찾았지만 병역문제로 3년간의 공백기를 거쳤고 그 참에 한국에 정착하게 된 나. 한국 바둑의 일인자가 되었지만 언제나 메이저 리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나.

그러나 십수년 동안 라이벌 서봉수가 있어서 승부가 지겹지 않았던 나. 이제는 이창호 유창혁 등 후학이 있어서 조금은 덜 외로운 나. 바야흐로 세계를 향해 진력해야할 시기에 한국을 대표해 조국의 명예를 한 단계 올려놓은 자랑스런 나.”

조훈현의 머리 속은 영화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클라이막스의 한 장면처럼 온갖 상념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만한 일이 다시 찾아올 수 없을 것이고 조국으로서도 이만한 쾌거가 또 어디 있었겠는가. 장거다. 바둑사에 길이 남을 투혼이 아니던가. 돌이켜보면 실질적 대표선수가 조훈현 한명이었고 대국장소도 어웨이 경기나 다름없는 불공정성을 극복한 승리이기에 더더욱 조훈현은 위대했다.

조훈현은 이튿날 서울로 향한다. 그리운 이들이 그를 공항까지 진을 치며 기다린다. 장사진이다. ‘조훈현 장하다! 바둑황제에 오르다!’라고 씌어진 대형 플래카드를 보고 다시 몰려든 인파가 무려 1,000명.

공항의 상당한 업무는 마비되기에 이르렀고 경비대가 출동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88올림픽이 있었던 탓인지 꼭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금의환향하는 스포츠맨과 같았다. 두뇌 스포츠까지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해 마지않는 사람은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공항귀빈실에서 조훈현은 말문을 연다. <계속>


<뉴스와 화제>

· 이세돌 왕위전 도전권 유력

32연승 행진을 마감했지만 이세돌의 활약은 이어지고 있다. 이세돌은 6월5일 한국기원에서 벌어진 왕위전 리그전에서 조훈현을 불계로 꺾고 리그전적 5연승을 질주했다. 한편 공동 1위이던 서봉수는 유창혁에게 덜미를 잡혀 4승1패로 2위로 내려앉았다. 이세돌은 서봉수와 유창혁과 두판을 남겨놓고 있는데 서봉수를 꺾으면 도전자로 결정된다.

· LG배 개막

제5회 LG배가 6월12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서울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13, 15일 본선 1, 2회전 막을 올린다. 작년대회에서 또 준우승에 머문 유창혁을 필두로 한국은 총 11명의 선수를 출전시켜 우승에 도전한다. 한국대표는 전통의 4인방에다 루이나에웨이까지 총 5명의 타이틀보유자와 함께, 이세돌 원성진 등 예선을 통과한 6명이다. 한편 5회 때부터 LG배는 상금 총규모를 13억5,000만원으로 증액하여 명실공히 최고 규모를 과시하게 되었다. 우승상금 2억5,000만원.

진재호 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0/06/13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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