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상표 따지지 않는 사회

미국의 한인 가정을 가보면 대개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물건이 있다. 소니 TV에 파나소닉이나 도시바 전화세트다. 냉장고나 세탁기는 대개 집에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 내가 다녀본 경험에 의하면 십중팔구는 소니 TV를 갖고 있다.

반면 미국인 가정에는 다양한 TV가 있다. 삼성이나 LG를 비롯, 도시바 미쓰비시 필립스 등 전세계의 브랜드를 거의 다 볼 수 있다.

그때마다 주인에게 “왜 소니를 사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은 대답이 “소니가 좋기는 한데 성능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하는 것이다. “어차피 오락용 가전제품인데 가격 대비 성능이 높은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냐”고 하면서 “그런 점에서 삼성 등 한국 제품이 좋다”고 칭찬한다.

그 소리를 들으면 한편으로는 국산 제품이 미국에서 평가받는 것에 가슴 뿌듯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집에도 소니 TV를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부끄러했던 기억이 있다.

새삼스럽게 국산품 애용 캠페인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국 가정의 합리적 소비 패턴을 한번 눈여겨보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미국 가정은 구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가격 대비 효용에 대해 광범위하게 분석한다.

소비자의 의사결정을 돕기 위한 Consumer Report 라는 잡지는 다양한 분야의 제품에 대하여 평가를 하여 매년 또는 분기별로 발표한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 이 잡지는 관련 제품의 광고를 게재하지 않고 있다.

이외에도 각 분야별로 전문 잡지가 있어 여러 제품에 대한 엄청난 정보를 제공하며 소비자는 이러한 정보를 토대로 나름대로 판단하여 제각기 구매 결정을 내린다.

이때문에 미국의 거리에 나가보면 바로 ‘다양성의 바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신호등에 걸려 서있는 차들을 보면 같은 회사의, 같은 형식의 차를 동시에 찾아보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이따금 저녁에 선술집에라도 갈라치면 같은 상표의 옷을 입은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개개인이 개성 있는 결정을 한 때문인 것 같다.

미국에도 유행은 있다. 그러나 절대적인 유행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렇기에 미국의 젊은이는 모두가 ‘말 탄 사람’이나 ‘악어’가 새겨진 셔츠나 ‘삼각형 마크’가 있는 청바지 또는 ‘체크 무늬’가 있는 황갈색 목도리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찢어져 무릎이 해지거나 목깃의 올이 터져나올 때까지 입을 것인데 삼각형 마크가 있거나 악어가 새겨져 있는 것은 별로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닌 것 같다. 색상과 스타일이 맞으면, 그리고 가격이 적절하면 사는 것이다.

물론 상표와 로고는 어느 정도의 품질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무시하지는 않지만 상표와 로고만을 위해 프리미엄을 지불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악어 꼬리가 말려있는가 아닌가, 말이 왼쪽 앞발을 들고 있는가 오른쪽 앞발을 들고 있는가 하면서 진위 여부를 따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일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욕심 같아서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것만을 갖고 싶지만 빚져가면서 허세만 부릴 수는 없지 않은가. 가격 대비 성능만 보장된다면 굳이 최고의 상표가 아니라도 합리적인 구매 결정을 내릴 지혜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어차피 민주주의가 성인(聖人) 정치가 아닌 바에야 말의 어느 쪽 앞발이 들려 있든, 악어 꼬리가 말려 있든지 아닌지는 이미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박해찬 미 HOWREY SIMON ARNOLD & WHITE 변호사

입력시간 2000/06/13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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