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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서거, 중동에 변화의 바람

하페즈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지난 10일 서거하자 아랍인들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었다. 시리아는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의 북한을 연상시킬 만큼 ‘통곡의 도가니’에 빠졌다.

철권통치로 무자비하게 반대파를 숙청하고 수니파 봉기과정에서 수만명의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독재자의 죽음을 이토록 슬퍼하다니, 세계는 의아한 시선으로 이들을 주시했다.

사실 아사드 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아온 아랍 지도자도 드물다. 그는 1970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30년간 절대군주였다. 인구의 10% 밖에 안되는 소수 시아파 출신으로 의회와 사법부를 무력화하고 군부와 경찰을 동원한 공포정치를 펴왔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그러나 아사드는 적어도 시리아 국민에게는 아랍 민족주의의 마지막 보루였다. 프랑스 식민통치를 경험하고 중동전쟁을 직접 치르면서 그는 아랍민족의 단결과 대의를 강조한 선각자로 추앙받았다.

특히 1967년 3차 중동전쟁 때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에 빼앗긴 이후 그는 이스라엘을 보복하기 위해 평생을 매진했다. 그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를 가져온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극렬하게 비난했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회담도 줄곧 반대해 왔다.


권력을 이어받은 아사드 아들 바샤르

아사드가 온몸으로 표방해온 반이스라엘과 아랍민족주의는 좌절한 아랍 민중에게 힘을 주었다. 이같은 정서를 업고 시리아는 아사드 사후 여론의 별다른 반대없이 즉각 그의 아들 바샤르를 후계자로 옹립하였다.

34세의 나이가 대통령 피선 자격을 갖지 못하자 당장 헌법을 고쳐 대통령 출마연령을 40세에서 34세로 낮추었다. 이런 코미디 같은 일이 일어나도 시리아 국민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랍민족주의의 대부인 아사드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의학공부(안과 전공)를 하던 바샤르는 1994년 형 바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후계자로 급부상했다.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탱크대대 지휘관으로 시작해 지난해 대령으로 진급했다.

바샤르는 초보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시리아의 정보통신(IT) 분야를 현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아버지 아사드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다. 컴퓨터 학회장을 맡았던 1998년 시리아 최초의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하기도 했다.


아랍에 몰아치는 권력세습

다마스쿠스의 부자간 권력 세습은 아랍세계에서 처음으로 이뤄졌다. 다마스쿠스는 최초의 아랍국인 우마이야 왕조가 수도로 정한 곳. 우마이야 왕조는 바로 이곳에서 전통적인 이슬람식 전원합의제 방식을 무시하고 부자간 권력 승계의 원칙을 확립한 바 있다.

이후 권력세습은 아랍 국가 통치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바샤르의 대통령 승계는 조심스럽게 부자간 권력 세습을 준비해온 다른 아랍 국가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1979년 집권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장남인 우다이(35)와 차남 쿠사이(33)를 저울질 하며 권력 승계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31년째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리비아의 최고지도자 카다피도 두 아들 알 사디와 셰이프 알피를 공식행사에 참석시키기 시작했다. 20년째 집권하고 있는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주변에서도 아들 후계설이 나돌고 있다.


아슬아슬한 권력, 변수 많아

물론 바샤르의 대권 승계에는 아직 넘어야 할 장애가 많다. 그는 아버지나 형과는 달리 군 경력이 미흡하다. 아사드의 오랜 집권 뒤에는 군부의 강력한 지지라는 버팀목이 있었다.

만일 군부가 독자적인 후계자를 옹립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할 경우 바샤르에게는 혹독한 시련이 될 것이다.

종교적 요인도 바샤르 등극의 또다른 변수로 꼽힌다. 아사드가(家)는 시리아내 소수파인 시아파 이슬람교에 속한다. 다수파인 수니파가 아사드의 죽음을 계기로 기존의 권력을 만회하려고 나선다면 바샤르의 입지는 좁아질 것이다.

여기에다 바샤르에 대한 삼촌의 견제가 다시 시작됐다. 아사드의 동생으로 지난 1995년 해외로 망명한 리파트 알 아사드(63)는 자신이 합법적인 대권 승계자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리파트는 “바샤르의 대권승계가 헌법에 명시된 절차를 위반했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불법 정권 승계를 바로잡기 위해 귀국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리아 정부는 리파트의 대통령 승계권 주장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리파트는 형 아사드 만큼이나 권력에 집착한 전력이 있다. 그는 지난 1983년 형이 심장발작을 일으킨 틈을 타 쿠데타를 주도했으나 실패했으며 이듬해 사면돼 부통령에 임명됐으나 큰 조카인 바실과의 불화로 1985년 해외로 망명했다.

그는 가족들의 청원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귀국이 허용됐으나 1994년 바실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직후 집중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으며 1995년 영구 망명길에 올랐다. 뒤이어 1998년에는 부통령직에서 정식 해임됐다.


퇴조하는 아랍민족주의

이제 중동의 늙은 사자는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아사드의 서거로 이랍민족주의 1세대의 마지막 깃발이 내려진 셈이다.

카다피와 후세인이 아직도 아랍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이미 그들의 영향력은 퇴조해 아랍내 반응도 거의 없다. 아사드 사후 중동은 본격적인 개별 국가 이익의 시대로 접어들 전망이다. 생전의 아사드도 결국 ‘팍스 아메리카나’호에 몸을 실었다.

그가 의지하던 구 소련이 무너진후 세계 재편에 나선 미국의 힘을 비켜갈 수 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걸프전쟁때 과감하게 다국적군에 참가하여 이라크를 응징하는데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실리를 추구하는 아사드의 새로운 노선은 결국 이스라엘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골란고원의 완전 반환을 위해 그는 집요하게 미국과 이스라엘을 설득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수자원의 40%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골란고원의 완전 포기를 여전히 거부하고 있다.

젊은 30대 바샤르의 등장으로 중동평화협상은 아랍의 대의 보다는 훨씬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전망이다.

또한 한국과의 수교를 끝까지 반대했던 아사드와는 달리 바샤르는 한국의 자본과 기술에 적극적인 손짓을 보낼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와의 수교 전망도 매우 밝아졌다.

이동준국제부기자 djlee@hk.co.kr

입력시간 2000/06/20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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