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화해시대] 온갖 루머 한방에 날려 보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김정일을 위한 무대였다.”

한 북한 전문가의 말처럼 6월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김 위원장은 시종일관 거침없는 말투와 유머로 남측의 방문자들은 물론 세계의 이목을 휘어잡았다. 지금까지 만연해온 자신에 대한 온갖 억측과 험담을 한순간에 날려버리고 ‘통 큰 지도자’로 각인시키는데 대성공했다.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과 북한 전문가들도 갑자기 쏟아지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육성과 행동을 분석하면서 기존의 평가를 상당부분 수정해야 하는데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듣고 배운 것과는 전혀 다른 김 위원장의 소탈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에 충격과 혼란을 겪고 있고 일각에서는 TV스타 못지 않은 ‘김정일 신드롬’까지 생기고 있다.


대중스타에 버금가는 ‘김정일 신드롬’

이번 정상회담에 참석한 우리측 수행원은 지금까지 드러난 모습만 볼 때 김 위원장이 활달하고 자신감이 넘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오랫동안 제왕학의 수업을 받고 자란 티가 나며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부자 권력승계 이후 서방측의 비관적인 관측에도 불구하고 최고권력자의 위치를 확고히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의 재치있으면서도 거침없는 말투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단연 압권이었다. 김 위원장은 14일 김대중 대통령이 묵고 있는 백화원 영빈관을 직접 찾아가 가진 환담에서 “구라파 사람들이 자꾸 나보러 뭐라고 말하냐면 ‘왜 은둔생활 하나. 은둔생활하는 사람이 첨 나타났다’고 한다.

난 과거에 중국도 갔댔고 인도네시아도 갔댔고 외국에도 비공개로 많이 갔댔는데 나보고 은둔생활 한대. 김 대통령이 오셔서 이제 은둔에서 해방됐다”고 말해 폭소를 유도했다. 14일 만찬장에서는 이희호 여사가 다른 테이블에 앉은 것을 발견하고는 임동진 대통령특보를 불러 의자를 가져오라고 한뒤 이 여사를 헤드테이블로 모시고는 좌중을 향해 “우리(김 대통령과 이 여사)를 이산가족을 만들려고 하느냐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연회장에서까지 이산가족을 만드느냐. 그래서 김 대통령께서 이산가족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라고 말해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김 대통령도 함박웃음을 터뜨렸을 정도였다. 이 여사에게는 “개성 토박이한테 음식을 만들어 보라고 했더니 파를 요만하게(손을 모아 적다는 제스처를 하면서) 썰어 넣습디다.

여기서도 ‘개성 깎쟁이’라고 하는데 서울사람도 깎쟁이인가요”라고 묻기도 했다. 또 건배제의 등을 위해 마이크를 두번 잡은 뒤에는 “내가 연단에 두번 나갔으니 출연료를 받아야 겠다”고 분위기를 고양시켰다.


포스닥 상한가, 서점가서도 인기

15일 마지막 오찬회동에서도 김 위원장의 말솜씨는 계속됐다. 김 위원장은 “오늘 아침 (남한신문)보도에 ‘김 위원장이 술실력을 시위했다’, 그렇게 나왔어. 어떻게 돼서 나한테 자꾸 화살이 집중되는지 모르겠다.

(김 대통령이 “저는 네번에 나눠 마셨습니다”라고 하자) 대통령께선 연로하시니까 대통령 술마시는 얘기는 전혀 없고…. 역시 김 위원장이 술실력이 날카롭다. 술실력이야 통일부 장관(박재규 장관)이 나보다 (위)…”라고 말해 좌중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김 위원장의 말 뿐만 아니라 행동도 ‘오만하고 충동적’이라는 선입견을 씻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김 대통령과 함께 이동할 때마다 한 발자국 정도 뒤를 좇아가는 예의를 지켰고 이희호 여사를 꼭 챙겨 다정다감한 면모를 보였다.

14일 만찬시작 때는 김 대통령의 의자가 자신과 똑같이 팔걸이가 없는 의자라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의전담당자를 불러 “팔걸이 의자를 갖다드려. 애초부터 준비하지 않고…”라며 여러차례 핀잔을 주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수시로 우리측 수행원들과 농담을 주고 받거나 질문을 해 최고지도자로서 당당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의 이같은 행동과 말이 TV를 통해 그대로 전달되면서 국내의 많은 사람이 인식에 혼란을 느끼고 있다. 특히 인터넷 등 가상공간에는 ‘김정일 쇼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가상 정치인 주식시장인 포스닥에 13일 북한 정치인으로 처음 상장된 김 위원장의 주가는 연일 상한가를 치고 있다.

교보문고 등 대형 서점에서는 지난 주부터 ‘김정일 100문 100답’(연합뉴스), ‘김정일 통일전략’(한림터), ‘현대 북한의 지도자’(을유문화사),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효형) 등이 정치·사회 관련 서적의 베스트셀러를 휩쓸고 있다. 이와 함께 ‘곁에서 본 김정일’, ‘이제 벤처는 평양이다’ 등의 책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 평양 학생소년예술단이 불러 인기를 모았던 ‘반갑습니다’는 젊은층에서 휴대폰 벨소리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아 이 노래의 휴대폰 벨소리 다운로드 건수는 1만건에 육박하고 있다. 시내 북한 음식점에도 평양회담 ‘특수’를 누려 평양냉면과 함께 김 대통령이 평양에 도착한 직후 첫 점심메뉴로 맛있게 먹었다는 ‘평양온반’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몰아치는 북한 바람에 우려의 목소리로

5월25일 개설된 ‘남북 정상회담 이야기’ 사이트(cafe.daum.net/613)에서 실시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라는 설문에서도 “그동안 알고 있었던 모습과는 달라서 놀라웠다”(73.1%)와 “지도자의 자질이 크다는 걸 느꼈다”(55.2%)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

젊은층의 관심과 유행이 가장 단적으로 표현되는 삼행시에도 남북 정상회담과 김정일 위원장은 단골로 떠올랐다.

하이텔 유머란에는 ‘원철’씨가 ‘김-김대중 대통령 어서오슈, 정-정말로 반갑소, 일-일찍이 만났어야 했는데. 세계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으니 잘해봅시다’, ‘김-김정일 국방위원장 만나서 반갑소, 대-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왔소, 중-중단없이 꾸준하게 남북대화를 이어갑시다’ 등 삼행시를 띄웠다.

천리안 게시판의 ‘나만의 삼행시’ 코너에도 ‘정상회담’을 주제로 한 사행시만 수백건이 올랐다. 또 대학가 일부 운동권에만 머물렀던 ‘북한 바로알기’가 평양회담을 계기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너무나 급작스러운 북한바람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선전선동에 능숙한 김정일 위원장이 세계의 이목이 쏠린 정상회담을 자신의 이미지 변신의 계기로 최대한 활용했다는 것이다.

치밀한 준비와 계산에 따라 연출한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진면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관찰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서울대 전인영 교수(국민윤리교육과)는 “정부가 그동안 북한을 금기시해오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소나기처럼 풀어 보여주니까 감정적으로 흥분돼있는 측면이 많다”며 “그러나 북한이라는 실체는 항상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며 흥분은 오히려 좋지않다”고 충고했다.

송용회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6/20 23:29


송용회 주간한국부 songy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