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용산구 이태원(梨泰院)

사람마다 제각기 이름이 있듯이 땅에도 고유한 이름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땅이름을 살펴보면 인간사 만큼이나 웃지못할 사연도 많다.

산수나 지형 등 자연환경에서 또는 지역 특산물에서 유래되거나 역사에서 땅이름이 붙여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어린조카 단종의 임금자리를 넘보아온 수양대군은 왕권다툼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계유년(1453년)에 당대의 실력자 김종서 등을 제거하기 위한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수양은 모사(謀士) 한명회(韓明澮)의 계략에 따라 장사들을 이끌고 오늘날 종로구 재동에 있던 좌의정 김종서의 집을 습격, 일가족은 물론 닥치는 대로 참살했다. 대학살의 참극이 지나간뒤 한명회는 피비린내를 없애려고 온 동네에 재(재)를 뿌려 온통 재투성이로 만들였다.

그 뒤부터 백성들은 피비린내 나는 참극의 현장을 ‘잿골’이라 불렀다. 그 잿골이 재동(齋洞)으로 소리빌림(音借)한 것이 오늘의 땅이름이다.

어처구니 없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땅이름을 얻은 것이 용산구 이태원이다.

지금부터 500여년전 임진왜란 때, 그러니까 선조25년(1592년) 평양에서 조· 명(朝·明)연합군에 밀리던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와 가토오(加藤淸正)의 부대가 용산에 주둔한뒤 이태원동에 있는 운종사(雲鍾寺)라는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가람을 습격하기에 이른다. 왜적들을 수도하는 여승들을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군이 퇴각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조정은 운종사 여승들과 같이 왜적의 아이를 낳은 부녀자들을 벌하지 않고 이곳에다 오늘날 보육원과 같은 것을 지어 아이들을 기르게 하였다. 말하자면 ‘태(胎)가 다른 이방인의 집’이라는 뜻으로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군들이 우리 나라에 귀화한 뒤 여기에 모여 집단생활을 하였으므로 이곳을 이타인(異他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늘의 땅이름이 이태원(異胎院)이 아닌, 이태원(梨泰院)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효종 때. 이곳에 배나무를 많이 심으면서 땅이름이 동음이의(同音異意)가 된 내력이다.

남산을 등지고 앞에는 한강수가 그림같다. 멀리는 관악, 청계산, 남한산이 한 눈에 들어와 서울에서도 조망이 빼어 나기로 이름난 곳이다.

‘아침 햇살에 한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 운종사 종소리, 넘어가는 저녘노을에 떼 기러기는 갈길을 재촉하고 목동의 피리소리 구슬퍼라…’라고 읊조리던 어느 옛 시인의 시에서도 목가적인 이태원의 전원풍을 그려볼 수 있다.

이태원은 조선조 중기부터 외국인들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기에‘이타인’(異他人), ‘이태원’(異胎院)이란 땅이름을 낳았고 6·25동란 이후에는 한동안 양공주들의 거리로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겼다.

지금은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우리 나라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국제적인 쇼핑타운이기도 했지만. 특히 88 서울올림픽을 치른 후로는 땅이름 처럼 ‘태(胎)가 다른(異 )’ 이방인들의 거리로 변모했으니 국제화 탓일까! 땅이름 탓일까!

<이흥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

입력시간 2000/06/2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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