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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아노미] 국보법 논란, 곤혹스런 법원·검찰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불거진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을 보는 법원·검찰의 심경은 괴롭기만 하다. 현행 국보법이 폐지돼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지만 ‘법적 안정성’을 우선하는 법조계로선 함부로 속내를 드러낼 수도 없고 또 현행법을 무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결성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하영옥(38) 피고인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이 열린 6월16일 서울고법 형사법정. 서울고법 형사2부 재판장 오세립(吳世立) 부장판사는 하 피고인이 법정에 들어서자 선고에 앞서 5분 정도 재판부의 입장을 설명했다.

형사재판 선고의 경우 형량과 유무죄 인정 사유만 간단히 밝히는 것이 관례여서 재판부가 모두(冒頭) 발언을 통해 입장을 표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재판장은 “어제 있은 남북 정상회담으로 화해와 협력을 위한 후속 조치가 기대되고 피고인에게 적용된 국가보안법도 개정의 목소리가 높아 선고를 늦추는 방법을 고려했다”면서 “하지만 현재로선 기존법을 고수할 수 밖에 없는 만큼 선고를 예정대로 진행키로 했다”고 토로했다.


법관들, 문제점·대안 적극 제시

이러한 변화는 남북 정상회담으로 인해 ‘죽은 법(국보법)으로 산 사람을 잡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이번 만큼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하급심 법관들도 예전과 달리 드러내놓고 국보법의 문제점과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모습이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최근 ‘대통령도 북한 가고 재벌 회장도 북한 가는데 우리가 왜 처벌받아야 하느냐’고 따지는 보안사범들이 부쩍 늘었다”며 “이들에게 일반인과 달라서 대통령 통치행위는 법리(法理) 밖의 문제라는 걸 설명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고 토로했다.

또다른 판사는 “국보법을 개정하려면 먼저 우리나라의 영토를 규정한 헌법 3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 전체로 규정한 헌법 조항은 휴전선 이북에 자리잡은 북한을 우리 영토에 불법점거하며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로 볼 수밖에 없게 한다는 지적이다.

물론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서울지법의 한 판사는 “양 정상간 합의서에 남북간의 관할구역을 명시한 남북 기본합의서의 효력을 재확인하거나 무력도발을 포기한다는 가시적 언급이 포함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보법 폐지를 언급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신중론자 역시 “국보법이 통일시대의 새 패러다임에 적합치 않은 것은 사실”이라며 “TV에 비친 북한 고위인사와 평양 시민을 보고 과연 반국가단체를 떠올릴 수 있겠냐”며 혼란스러움을 내비쳤다.


검찰, 현실·규범사이에서 ‘혼란’

이런 고민은 검찰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상회담 기간중 서초동 검찰청사 내에서 유행했던 우스개 소리가 있다. 대통령의 초청 입북은 국보법상 잠입·탈출이며, 양측 실무자의 사전 협의는 반국가단쳬 구성원과의 회합·통신이고, 남북 정상이 악수를 나누고 서로를 추켜세운 것은 찬양·고무죄에 해당한다는 것.

남북간의 거리가 가까와질수록 현실과 규범(국보법)과의 괴리는 그만큼 커진 것이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대학가 인공기 게양사건을 둘러싼 검찰의 대응방식에서도 드러났다.

서울대 등 10여개 대학 학생들은 남북 정상회담 기간 중인 지난 6월13일 학생회관 출입구 등에 가로 1㎙, 세로 1㎙ 크기의 태극기, 인공기, 한반도기가 각각 그려진 대형 걸개그림 3개를 나란히 걸었다. 검찰은 명백한 국보법 제7조(찬양·고무) 위반인 만큼 즉각 주동자를 적발해 사법처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이틀 뒤 “범의(犯意)를 따져 처벌여부를 결정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당시 검찰의 강경방침이 언론에 보도되자 북한에 가 있던 우리측 대표단으로부터 들어온 항의도 검찰의 입장선회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현행 법질서를 지키고 범법행위를 처벌해야 할 입장에 서 있는 검찰로서는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 아직까지 공안 관계자들은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 휴전선을 지키고 있는 우리 군인은 총부리를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며 종전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검찰이 앞으로의 공안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라며 “입법기관에서 하루빨리 정치현실의 변화에 맞춰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고 속내를 내비쳤다.

김영화 사회부 기자 yaaho@hk.co.kr

입력시간 2000/06/2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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