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팀은 '양치기 소년'

정부의 정책뒤집기 다반사 신뢰추락

“경제팀은 양치기 소년이다.” 최근 정부가 대우 계열사 담보 기업어음(CP)를 약속대로 100%에 사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80%에 매입하겠다고 밝히는 등 정부가 ‘말바꾸기’를 거듭하자 한 투신사 임원은 불편한 속내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정부는 지난해 7월 대우사태가 터지기 직전 투신사와 은행·보험사 등 금융기관에 3조9,182억원 상당의 대우 담보 CP에 대해 손실 보전을 약속하며 반강제적으로 지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부는 최근 투신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대우 담보 CP 2조3,000억원 어치를 한국자산관리공사를 통해 80%에 사들이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100% 전액 보전해주겠다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며 발뺌하며 오히려 80%도 많이 주는 것이라며 생색을 내고 있다.

투신사들은 정부의 이번 조치로 그동안 대우채 손실비율에 포함시키지 않아 부담했던 지난해의 대우 무보증채 손실에 이어 또다시 최소한 8,000억원의 추가 손실을 새로 떠안게 돼 투신권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됐다.


“정부말 믿고 자금운용 못한다”

대우채 인수 논쟁은 정부와 금융권간에 빚어지는 많은 분쟁 사례중 하나에 불과하다. 금융시장 주변에서는 거듭되는 관치 금융과 정부의 말바꾸기로 시장은 더이상 정부의 어떤 정책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터져나오는 형편이다.

최근 중견 대기업의 목줄을 죄고 있는 자금 경색도 따지고 보면 대출을 기피하는 금융권 전체의 ‘몸사리기’에 따른 것으로서, 여기에는 정부의 ‘말뒤집기 금융정책’이 주요 원인의 하나라는 게 정설이다.

금융권이 겉으로는 BIS 비율 충족과 채권시가 평가제 시행 등으로 자금 여력이 없다고 발뺌을 하지만 실제로는 더이상 정부의 말을 믿고 자금운용을 할 수 없다는 ‘무언의 시위’로 보는 것이다.

대우채를 둘러싼 정부(금감위)와 투신사간의 악연은 지난해 7월26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정부는 금융기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김우중 회장의 주식을 담보로 대우의 CP를 인수할 경우 정부가 지급을 보장하겠다며 투신사를 비롯한 금융기관에 담보 CP 형식으로 추가 지원하라고 독촉했다.

한 투신사 임원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투신사 사장과 운용담당 임원들은 대우에 추가지원하라는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고위층의 전화를 피하려고 집에도 가지 않고 여기저기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밤 12시부터 걸려온 전화는 새벽 3시가 넘도록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금감위 관계자는 “투신사들이 높은 이자를 주는 대우 회사채를 주로 편입했다가 대우가 어렵다는 얘기가 돌자 무차별적으로 자금을 회수하는 바람에 오히려 대우문제가 더 악화됐다”며 “대우 담보 CP를 매입하도록 지도하지 않았다면 경제시스템 자체가 붕괴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억지로 떠밀린 대우CP 매입

금감위의 이같은 독려에 못이겨 투신사와 은행은 돌아온 자금 4조원을 해결해주었다.

그러나 김우중 회장이 내놓은 담보는 모두 10조원 어치라고 했지만 실제 평가는 2조원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었다는 게 투신사 관계자의 설명. 당시 금감위원장이었던 이헌재 재경부장관을 비롯해 금감원 부원장 등이 대거 나서 대우에 자금을 지원하라고 투신사를 압박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우 담보 CP를 가장 많이 인수한 곳은 투신사들이었다. 총발행 물량 3조9,182억원 가운데 2조3,000억원을 투신권이 떠안았다.

투신사별로는 삼성투신이 5,343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한국투신(3,007억원) 현대투신(2,961억원) 제일투신(2,836억원) 주은투신(2,424억원) 대한투신(1,445억원)의 순이었다. 다른 투신사도 많게는 900억원에서 적게는 100억원까지 대우 담보 CP를 사들였다.

투신사들보다는 형편이 상당히 나은 편이지만 은행과 보험사도 피해를 보기는 마찬가지. 은행은 1조5,996억원을 추가로 지원했고 보험사는 186억원 어치의 대우 담보 CP를 매입했다.

이처럼 정부 독려로 대우에 자금을 지원했던 투신사들은 최근 정부가 대우 담보 CP를 80% 가격에 사들이겠다는 결정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특히 공적 자금이 투입된 한국투신과 대한투신을 제외한 다른 투신사들은 정부가 대우 담보 CP 매입을 강권해놓고 이제와서 손실을 전가시키려는데 대해 강한 불만감을 나타내고 있다. 손실분을 자체적으로 다시 조달해야 하는 입장이어서 부실규모가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투신사 임원들은 최근 연일 모임을 갖고 대우 담보 CP를 정부가 100% 전액 상환해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얼마전에는 제일투신운용의 대표이사 등 몇몇 투신사의 임원이 금감원을 항의 방문해 대우 담보 CP를 100%에 매입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자산관리공사가 80% 수준에서 대우 담보 CP를 매입할 경우 투신사들은 자본잠식은 물론 앞으로 증권사와 고객들로부터 집단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 투신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추가지원으로 인한 손실분을 보전해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이제 와서 업계가 책임지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반발했다.


깊어지는 불신, 금융시장 안정 요원

더욱이 정부는 지난 2월초 투신권의 대우 무담보채권을 자산관리공사를 통해 넘겨받으면서 장부가의 평균 34%를 잠정 매입가격으로 제시했으나 최근 이 매입가격을 20~30%씩 낮춘 정산안을 각 투신사에 제시했다.

정산안에 따르면 ㈜대우 무담보채권의 매입률이 15.5~16.5%로서 2월 이관시의 18%에 비해 낮아진 것은 물론, 대우자동차의 경우 33%에서 29~33%, 대우중공업은 65%에서 34~36% 등으로 각각 떨어졌다.

투신사들은 “자산관리공사의 해외채권 평균 매입률 39.9%에도 턱없이 모자란다”며 “자산관리공사안대로라면 수천억원대의 추가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가뜩이나 고객의 수탁고가 줄어들어 어려움에 빠진 투신사로서는 고객의 신뢰회복은 물론 경영 정상화에 상당히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다른 투신사 관계자는 “정부의 최근 행태는 관치 금융과 정부의 말바꾸기의 구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며 “이제는 속을 만큼 속아서 정부의 정책을 앞으로는 전혀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말뒤집기 금융정책’은 정부정책의 대한 불신만 깊어지고 금융권의 대출기피 등의 현상이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다른 투신사 관계자는 “신뢰를 쌓기는 매우 어려우나 잃기는 아주 쉬운 법인데 정부관리들은 이런 법칙을 모르는 모양”이라며 “정부와 시장참여자들이 공조해도 시장살리기에 어려운 마당에 정부가 신뢰를 잃어만 가고 있어 금융시장 안정은 요원하다”고 답답해했다.

권대익 경제부기자

입력시간 2000/06/27 19:57


권대익 경제부 dkw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