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엑기

겨울 홋카이도에 담긴 일본, 일본인

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에 대해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라는 평이 나오기도 하지만 영화에 국한해보면 그리 낙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개봉된 일본 영화의 흥행은 관객층이 넓어지고 점유율도 높아지는 추세다.

3차 개방에서 18세 미만 관람가 등급은 제한되었지만 이 역시 곧 풀릴 것이므로 자신감 운운은 안일하기 짝이 없는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노컷트 판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적극 찬성하는 쪽이지만 우리 영화 산업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의 제한된 개방으로 가장 피해를 본 일본 영화는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과 후루하다 하스오의 <엑기>일 것이다.

<감각…>은 배우의 실제 정사와 음모 노출로 몇 장면이 잘려나갔는데 우리 정서와 심의 문제 등을 감안해볼 때 억지로나마 수긍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엑기>는 전체 이용가 등급을 받기 위해 수입사가 35분이나 자른 경우여서 용서할 수가 없다. 감독의 동의 없이는 영화에 절대 손을 댈 수 없다는 법이 제정되었으면 싶다.

<러브 레터> <철도원> <사무라이 픽션>의 흥행 성공은 영화적 완성도, 그리고 관객 타겟이 분명한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중장년층을 모은 <철도원>에 대해서는 감동적이지만 일본 군국주의 냄새가 난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맡은 일에 완벽을 기하는 비장함을 군국주의로 확대 해석하기 보다 칭송받아 마땅한, 우리나라에 필요한 직업정신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일보다 가정의 행복이 우선이라는 주장이 할리웃 영화의 기본 정서이기도 하지만 대의를 위해 개인의 삶을 포기하는 남자의 기개가 그리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정서가 거슬리는 분이라면 <철도원>의 감독 후루하다 야스오와 주연 배우 다카쿠라 켄 콤비가 1981년에 발표한 <엑기(驛)>(스타맥스) 또한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엑기>는 형사 미카이 에이지가 수사에 바친 20년 세월에 대한 애가(哀歌)라 할 수 있다. 그의 인생에 방점을 찍고 간 세 여성의 이름을 소제목으로 달고 있는데, 이는 여성과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없었던 그의 박복한 인생에 대한 미안함이 섞인 헌사로 보인다.

1968년과 1976년, 1979년이 시대 배경으로, 삿포로를 중심으로 한 홋카이도오의 엄청난 눈과 두량 짜리 열차가 멈추는 시골 역사의 쓸쓸함이 공간적 배경이 된다.

미카이는 딱 한번 남편을 배신한 것으로 짐작되는 아내를 단호히 떠나보내고 멕시코 올림픽 출전 사격 선수로 발탁되어 고된 훈련을 한다. 그런 그를 따뜻하게 꾸짖었던 선배가 총격사건으로 사망한다.

사랑했던 고향 남자 대신 외지 남자와 결혼하게 된 여동생, 살인한 오빠를 숨기기 위해 바보 노릇을 했던 식당 여종업원이 겹쳐지며 미카이의 두번째 장이 마감된다. 새해를 고향 섬에서 보내려다 폭풍으로 발이 묶인 미카이는 작은 술집의 여주인과 정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총과 범죄에 얽힌 인생 만을 뒤쫓던 그에게는 이런 행복도 과분한 것이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과는 또다른 정서로 폭설마저 그립게 하는 영화. <엑기>를 보고 겨울의 홋카이도오를 꿈꾸지 않는다면 정서상 문제가 있다고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무쇠 난로가 있는 시골 역사에 가면 사직서를 찢는, 외로움을 무표정 속에 감춘 강직한 사나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정사 신이나 살인 장면은 오히려 살려두고 누가 봐도 동감할 수 있는 정서적인 장면만 잘라 전체관람가 등급을 받아냈지만 연말 TV 프로의 대미를 장식하던 10대 가수 청백전을 추억할 수 있는 세대를 위한 영화다.

옥선희 비디오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0/07/0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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