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30년] 정주영의 ‘밀어붙이기 신화’

총 구간 40% 건설, 오늘의 현대 토대 굳혀

‘호랑이 정주영’도 덤프트럭 기사에게는 이기지 못했다.

기한내 시공을 최대 목표로 내걸었던 정주영 현대건설사장(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작업차 최우선’원칙을 내걸었다. 직원들에게 트럭이 다가오면 무조건 길을 비키도록 명령했고 자신도 그렇게 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정주영 전명예회장에 대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은 남달랐다. 고속도로 건설경험과 특유의 밀어붙이기로 대통령의 ‘속도전’의지를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사업 기획단계부터 참여하고 공사구간 배정에서 특혜를 받은 것도 대통령의 신임과 직결돼 있었다. 공사에 참여한 16개사 중 현대는 서울~수원구간을 수의계약으로 따낸데 이어 수원~오산, 대구~부산 구간도 맡아 총 구간의 40%를 담당했다.


‘속도전’수행, 박통 신임 한몸에

정 전명예회장의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에 인용된 박정희의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현대건설만이 유일하게 고속도로 건설(태국)의 경험이 있으니까,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단시일 안에 경부간에 고속도로를 놓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보시오.”

이에 따라 현대측이 대구~대전 구간을 2차선으로 한다는 전제하에 산정한 건설비는 280억원. 건설부가 산정한 650억원, 재무부 330억원, 육군 공병감실 490억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서울시가 제출한 180억원은 시내도로 건설감각으로 산정돼 일찌감치 논외가 됐다.

책정된 건설비는 현대안과 재무부안을 절충한 300억원에 예비비 10%를 합한 330억원. 대전~대구 구간이 4차선으로 변경되고 지가상승분이 감안되면서 최종 건설비는 430억원으로 불어났지만 현대는 건설부로부터 ‘토목의 토자도 모르는 것들이 일을 저질렀다’는 욕을 얻어 먹었다.

‘공기단축’은 정 전명예회장의 구호이자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당시로선 천문학적 돈인 800만달러를 들여 1,989대의 최신 중장비를 도입했다. 1965년말 국내 민간건설업체가 보유하고 있던 중장비는 1,647대에 불과했다. 이런 면에서 경부고속도로는 최신 중장비를 투입한 최초의 공사로 기록되고 있다.

정 전명예회장이 직면했던 최난구간은 소백산맥을 관통하는 상하행 각각 590㎙, 530㎙의 당제터널 공사. 암반이 아닌 퇴적토사로 이뤄진 구간을 굴진해야 하는 탓에 기한내 완공은 물건너갈 판이었다.

정 전명예회장이 타개책으로 채택한 방법은 양생이 일반 시멘트보다 10배 이상 빠른 조강시멘트를 사용하는 것. 조강시멘트는 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이때 그는 장부를 덮었다.

“어차피 출발부터 수판 엎어놓고 덤벼든 일. 그래도 이익을 남길 수 있다면 좋지만, 타산 못맞출 바에야 공기라도 맞춰야지.” 당제터널 공사는 고속도로 개통 예정일인 7월7일을 열흘 앞두고 마침내 끝났다.


중동 건설특수 디딤돌

수판을 엎었지만 현대는 경부고속도로 공사로 3억3,100만원을 남겼다. 더욱이 박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이후 거의 모든 공사를 따내면서 급성장할 수 있었다.

울산~언양간 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건설 등이 1970년대 초반 현대건설이 맡은 공사의 면면이다. 이들 공사에서 쌓은 노하우와 명성을 바탕으로 중동에 진출하면서 현대는 재계 서열 1위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과 정 전명예회장은 한국 자본축적기의 맨털리티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정권의 압축발전 전략과 기업가 정신이 결합하면서 경부고속도로는 한국의 재벌형성에 한 몫을 한 셈이 됐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7/04 19:51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