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⑮] 후조쿠(風俗)②

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시가집 ‘만요슈’(万葉集)에는 노래와 춤으로 남자를 유혹해 몸을 파는 ‘우카레메’(遊行女婦)가 등장한다.

이들의 생태는 분명하지 않지만 차용해 쓴 한자의 뜻으로 보아 각지를 떠돌던 유랑민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10~12세기에는 ‘아소비메’(遊女)란 고유어가 나타났다.

‘쇼조’(娼女), 절세미인을 뜻하는 ‘게이세이’(傾城) 등의 한자말도 같은 뜻으로 쓰였다. 16세기에는 ‘조로’(女郞)라는 호칭도 쓰였다. 에도(江戶) 요시와라(吉原) 일대의 상급 조로는 특별히 ‘오이란’(花魁)이란 미칭으로 불렸다.

오늘날 일본의 ‘후조쿠조’(風俗孃)의 원형인 우카레메는 반기(半妓)·반창(半娼)적 존재였다. 정착할 토지를 갖지 못했고 개인·집단의 성향이 농경·정착생활에 맞지도 않았던 예능집단의 여성이었다.

꼭두각시 놀음과 노래를 공연하며 각지를 떠돌던 무리로 일본판 집시라고 할 수 있는 ‘구구쓰’(傀儡)집단의 여성인 ‘구구쓰메’(傀儡女)와도 통한다. 구구쓰메라는 말이 창기와 동의어로 쓰였듯 이들도 예능과 매춘을 겸했다.

우카레메의 이런 성격을 특별한 것으로 치기는 어렵다. 우리 사당패의 여성들이 그랬고 초기의 ‘가부키’(歌舞伎) 배우도 그랬다. ‘오도리코’(踊子)도 애초에는 춤이 주기능이었으나 차차 춤은 껍질로만 남아 나중에는 아예 오도리코라는 말이 바로 사창을 가리켰다.

어쨌든 우카레메의 예술적 기능은 아소비메를 거쳐 ‘유조’(遊女)에게 이어졌다. 유조는 아소비메의 한자 표기를 소리로 읽은 것으로 우리 식으로는 똑같이 ‘유녀’로 읽히지만 16세기 말 설치가 시작된 공인 유곽의 공창을 한정해 가리켰다. 거리의 사창을 포함한 창기를 통틀어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유녀는 용모는 물론이고 상당한 교양과 예능을 요구받았다. 이 3박자에 수준차가 있었던 데다 신분 사회의 분위기가 겹쳐 자연스럽게 유녀에게도 등급이 매겨졌다. 등급에 따라 비용은 물론 격식이 달랐다.

초기의 ‘다유’(太夫), ‘고시’(格子), ‘하시’(端) 등 3등급 가운데 최상급인 다유는 반드시 유곽내의 ‘아게야’(揚屋)라는 고급 놀이집으로 불러내 놀아야 한다는 등의 까다로운 격식이 있었다.

상급 무사 등 지배층이 주된 고객이 된 결과 유곽은 고급 사교장의 기능을 띠었다. 교양과 예능을 갖춘 유녀와 상류층의 격식에 따른 유흥은 중세 귀족문화를 표본으로 한 유곽 문화를 낳았다.

한량들의 탁트인 풍류의 멋에 해당하는 ‘스이’(粹)라는 독특한 미의식이 대표적인 예였다. 유녀가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여겨지기까지 한 것도 남성 우위 사회의 상징적 단면이다.

재색을 겸비한 유녀의 이같은 이미지는 17세기 말에는 거의 흐려졌다. 유녀의 교양과 예능 수준이 크게 떨어진 것이 원인으로 지적되지만 고객의 취향 변화가 보다 근본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유곽의 쇠퇴와 유녀의 창기화는 선후를 따지기 어렵지만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유녀는 사창과 구별하기 어렵게 됐다.

메이지유신 이후 공인 매춘부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유녀라는 말 자체가 실용어로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됐다. 그런 이름에 걸맞는 존재도 없었고 더이상 좋은 어감도 아니어서 사창에 대해서조차 쓰이지 않게 된 때문이었다.

한편 바닥에 떨어진 유녀의 예능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 ‘게이샤’(藝者)였다. 게이샤는 유곽의 정식 구성원인 ‘구루와(廓) 게이샤’와 오도리코에서 나온 ‘마치(町) 게이샤’로 뿌리가 갈려 있었고 그 격도 유녀와 사창만큼 달랐다.

그러나 유곽·유녀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이런 갈래는 이내 의미가 사라졌다. 예능과 매춘의 좌표축에서 어느 쪽으로 많이 기울었는가 하는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메이지유신 이후 게이샤는 일본 화류계의 주역이 됐다. 색보다는 예능쪽으로 기울어 있었던 구루와 게이샤의 맥도 어느 정도는 이어졌다. 10살 정도에 뽑히거나 팔려와 예능과 접대법 교육을 거친 후 17세 무렵에야 제대로 된 게이샤로 행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매춘 전문의 여성을 게이샤란 이름으로 둔 업자도 많아 실상은 각양각색이었다. 게이샤는 그 성격뿐만 아니라 운명도 조선시대의 기생과 비슷했다. 진짜 게이샤는 2차대전 이전에 이미 드물어졌고 무늬만의 게이샤도 전후 빠르게 사라졌다. 교토(京都) 기온(祇園)의 ‘게이코’(藝子) 등이 전통문화나 관광상품으로 남았을 뿐이다. <계속>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0/07/05 10:33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