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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게놈 해독 뒤엔 '적과의 동침' 있었다

콜린즈, 벤터박사 공동발표 '경쟁적 협력관계'로 염기서열 규명

지난 4월 어느날 미국 에너지부에서 인간게놈 프로젝트를 지휘하는 아리 파트리노스 박사는 게놈해독 국제컨소시엄인 ‘휴맨게놈 프로젝트’(HGP:Human Genome Project, 인간이 가진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파악하고 각 유전자의 역할을 규명하는 연구)를 사실상 총괄하는 프랜시스 콜린즈 박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콜린스 박사는 “일단 한번 해보자”고 말했고 그 순간 파트리노스 박사는 게놈(genome, 유전자와 염색체의 합성어, 인체의 유전정보라는 뜻. 유전정보는 인체 세포에 있는 23쌍의 염색체를 구성하는 DNA, DNA를 구성하는 30여억개에 이르는 염기들의 나선형 조합으로 전달된다) 해독을 둘러싼 오랜 분쟁을 해소할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지난 수개월 동안 콜린스 박사는 인간게놈의 비밀을 풀기 위해 독자적으로 연구해온 ‘셀레라제노믹스’사장 크레그 벤터 박사와 의견대립을 해소하라는 압력을 받아온 터였다.

의견대립이란 이 과학적 업적을 누구의 것으로 하며 어느 쪽의 게놈 해독이 더 완벽하고 유용한지, 또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게놈 정보를 자유롭게 교환할 것인지 등에 관한 것이다.

양측의 대립으로 이 프로젝트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됐지만 연구개발의 속도는 오히려 떨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파트리노스는 중재에 나섰고 빌 클린턴 미 대통령조차 백악관 과학보좌관에게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도록 만들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벤터 박사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막말을 잘하는 그는 이미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할 처지였다. 또 분쟁이 계속되면 생명공학 분야의 역사적 의미가 퇴색된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지난 3월에는 클린턴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모든 게놈정보는 자유롭게 공유돼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셀레라사의 주식은 즉각 주당 189달러에서 149달러로 곤두박질쳤다.

그로부터 한달쯤 뒤인 5월7일 파트리노스의 록스빌 자택에서는 콜린즈와 벤터가 맥주잔을 들고 함께 앉았다. “그렇게 살벌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고 파트리노스가 털어놓을 만큼 서로간에 불신이 깊었으나 두 사람의 만남은 계속됐다. 결과는 공동발표.

양측은 10여년간의 기획과 연구 끝에 밝혀낸 인간 유전자의 31억개 생명화학적인 문자(염기, DNA의 구성요소로서 A,C,G,T 4종류가 있다), 다시 말해 인체기능을 조정하는 유전자 코드(염기서열)의 비밀을 함께 발표한 것이다.


게놈시대의 개막

인간게놈 해독의 성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유전자 코드를 알면 인체의 비밀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알츠하이머병에서 심장병, 암에 이르는 모든 불치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료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생명의 연장도 가능하다. 의료계는 수십년만에 대변혁을 겪게되고 역사는 이 발표를 ‘게놈시대의 개막’으로 기록할 것이다.

공동발표했지만 과학자들은 벤터의 연구가 더 앞서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HGP측은 유전자 염기서열의 97%를 해독했지만(나머지 3%는 일정한 규칙이 없고 제멋대로다), 그중 53%만 제대로 된 서열을 찾아냈다.

이는 마치 ‘생명의 책’에서 페이지만 제대로 배열했을 뿐 각 페이지에 있는 글자는 제멋대로 되어 있는 것과 같다. 콜린즈는 이것을 또 제대로 분류하려면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실토했다.

이에 반해 셀레라측은 페이지 배열뿐만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단어와 문자까지도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이 문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른다. HGP측이 정확도를 기하기 위해 거의 7차례나 (염기)서열을 만들어보았다고 자랑하지만 셀레라측은 독창적인 방법으로 5차례 시행으로 만족했다.

셀레라측은 (염기)서열을 더욱 빠르게 알 수 있는 새로운 테크닉을 보유하고 있다며 “이 방법을 이용해 올해 말까지 쥐의 게놈을 해독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쥐는 인간과 비슷하게 23억개의 염기를 갖고 있어 이를 규명할 경우 인간 게놈의 기능을 추적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활용된다.

그런데 벤터측은 왜 이같은 업적을 떠벌리지 않는가. 노벨상 후보자로 치켜세우지 않는가. 천사처럼 보이는 벤터는 그러나 동료 과학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 동료들은 그를 ‘게놈연구의 히틀러’, ‘게놈연구의 독불장군’으로 부른다.

그의 지나친 자아의식(그가 분석한 샘플 중 하나가 자신의 DNA라는 설도 있다)과 언론 플레이를 중시하는 성향(그의 실험실 문은 언론에 항상 열어놓고 있다) 등을 차치하더라도 그는 대접을 제대로 못받고 있다. DNA 해독의 선구자인 제임스 왓슨 박사같은 이는 염기서열분석 로보트와 슈퍼 컴퓨터를 이용하는 그의 게놈해독방식을 빗대 “원숭이들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진짜 이유는 벤터의 높은 콧대와 말 때문이다. 그는 과학자들의 고리타분함을 곧잘 비웃는다. “그에게는 필터가 없다. 아무 소리나 막 해버린다”고 록펠러 대학의 노턴 진더 교수는 안타까와했다.


돈방석에 올라앉은 벤터박사

벤터는 게놈해독을 시작한 미 국립보건원(NIH)을 떠난 뒤 인생이 크게 달라졌다. 은행잔고가 2,000 달러에 불과한 정부 과학자에서 연봉 56만 달러에 요트와 스포츠카를 가진 백만장자로 변한 것. 여기에는 5억5,100만 달러에 이르는 셀레라의 주식 평가는 포함돼 있지 않다.

벤터가 게놈해독에는 15년에 30억 달러가 소요된다는 HGP측의 주장을 뒤엎고 불과 3년만에, 그것도 2억 달러만으로 모든 인체게놈 비밀을 밝히겠다고 선언했을 때 동료들로부터 바보취급을 당했다.

분석의 정확도나 신뢰도에 대한 의구심도 컸다. 어떤 이는 정부가 주도해 자료를 모아놓은 웹사이트 겐뱅크(Genbank, www.ncbi.nlm.nih.gov)를 도용하는 사기꾼이 될 것이라고 비웃기도 했다. 벤터는 한때 “그런 비판에 마음이 상했다”고 털어놓기도 했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게놈 알파베트(염기)의 서열을 알아내는 것은 첫 단계에 불과하며 이 문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그는 지적한다. 어떤 문자에 문제가 생기면 질병이 발생하고 그 자체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등을 알아내는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벤터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며 동료들이 그렸던 ‘이상한 사람’을 떠올릴 수는 없다. 마치 1960년대에 살았던 50대의 어린이가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몰몬교 신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커피 술 담배도 일체 배우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는 편이었고 졸업 후에도 뉴포트 비치로 서핑을 하러 다녔다.

그러나 해군정보학교 시험에는 지원자 35,000명 가운데 수석을 차지했다고 한다. 시체 처리훈련을 받고 베트남전에 투입됐다. “베트남이 그를 바꿨다. 베트남에서 그는 1분1초까지 따질 정도로 시간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그의 아내는 말했다.

베트남에서 돌아와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6년간 공부한 뒤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의 국립보건원(NIH)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뇌세포의 아드레날린 분비 프로테인(단백질)에 관한 유전자 규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속도가 너무 느렸다. 불만을 느낀 그는 1986년 레이저를 이용해 염기서열을 읽을 수 있는 기구가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서부로 날아갔다. NIH는 한푼도 지원하지 않았지만 제조자인 마카엘 헌카필러로부터 염기서열 판독기구 한 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1년만에 인간게놈의 31억개 염기가운데 10만개를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게놈연구소 ‘타이거’설립

그에게는 그것이 도저히 풀 수 없는 상형문자와 같으나 살아있는 세포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세포는 DNA의 유전정보를 전달받은 RNA의 정보단위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벤터는 새로운 RNA를 수집, 이를 박테리아 세포에다 주입해 서로 결합하도록 한 뒤 이를 원래 유전자와 비교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자동판독기는 DNA 유전정보의 문자들을 읽어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1991년 6월까지 347개 유전자를 더 규명해냈다. 그 때까지 규명된 유전자는 모두 5만여개 중에서 2,000개 정도. 그의 상사는 기뻐했으나 NIH 원장인 왓슨 박사는 그 방식에 불만을 나타냈다.

NIH를 그만두고 스스로 게놈연구소 타이거(TIGER)를 세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행히 의료 자본가인 월래스 스타인버그가 7,0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샘플을 뽑아 염기배열을 분석하는 작업은 그렇게 계속했다.

어느날 노벨상 수상자인 해밀턴 시미스가 ‘샷건’ 방식의 게놈분석법을 제안했다. 원리는 간단했다. DNA를 아주 작은 수백만개의 조각으로 쪼개 그것을 한번에 500개씩 읽을 수 있는 배열기에 올려 분석한 뒤 다시 고성능 컴퓨터를 이용해 전체 게놈으로 합성하는 방식이다.

HGP측은 샷건 방식보다 DNA를 더 크게 잘라 최우선적으로 유전자에 대해 연구한 뒤 배열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바람에 염기서열 해독은 더 늦어졌다.


개별유전자기능은 여전히 미스터리

벤터는 정확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 거꾸로 맞춰보는 검증방식도 도입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1995년 바이러스성 뇌막염을 일으키는 박테리아 돼지 인플루엔자균의 게놈을 해석해냈다.

이 박테리아는 200만개의 유전자 게놈정보를 갖고 있어 살아있는 생물체에 대한 첫 게놈해독이었다. 그제서야 왓슨 박사도 “과학에서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그를 인정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은 샷건 방식의 정확도에 의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1998년에 더욱 빠른 자동염기서열 분석장치가 나왔다. 헌카필러가 만든 ABI프리즘 3700으로서 기존의 분석장치보다 5배 이상 빠른 것이다.

벤터는 헌카필러와 제휴관계를 맺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바로 셀레라였다. 라틴어로 ‘빠른’이라는 뜻이다. 그는 새로 3억 달러를 투자받아 2001년까지 모든 인간게놈을 해독하겠다고 발표, 과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HGP도 놀라 염기서열 분석장치를 사들이는 등 부산을 떨었다.

지난 3월 초파리(drosophila)의 게놈해독에 성공한 벤터는 “HGP와 경쟁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생명에 충격을 주기 위한 경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제 남은 것은 이번에 규명된 염기의 서열을 바탕으로 개별 유전자의 기능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작업이다. 개개 유전자가 어디에 존재하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규명하는 ‘퍼즐 맞추기’ 작업이다. 일부 유전자에 대한 해독작업이 완료됐지만 아직도 대부분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콜린즈와 벤터 박사의 판이한 성격을 감안하면 공동발표는 화학적인 결합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휴전’의 성격이 짙다. 앞으로도 두 팀은 각기 연구를 계속하겠지만 그나마 유전자 하나의 역할에 대해서만 특허가 가능하다는 점에 합의했으니 다행이다.

정리: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2000/07/0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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