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16)] 후조쿠(風俗)③

1945년 8월26일 일본의 주요 신문에는 이런 광고가 실렸다. “전후처리를 위한 국가 긴급시설의 하나로서 주둔군 위안의 대사업에 참가한다. 신일본여성의 솔선참가를 바란다. 여자종업원 모집. 나이 18~25세. 숙식·의복 제공.” 광고주는 긴자(銀座)에 본부를 둔 RAA라는 단체였다.

화류계 대표들이 만든 ‘특수 위안부 설비협회’의 영어 약자라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드러났다. 자본금 1억엔 가운데 5,500만엔은 대장성의 보증으로 당시 강교(勸業)은행이 융자해주었다. 앞서 8월18일 경찰청은 곧 진주할 미군 전용의 위안소 설치 문제를 화류계 대표들과 협의했다.

8월27일 도쿄(東京) 오타(大田)구 오모리(大森)의 요정 ‘고마치엔’(小町園)이 1호 미군 전용 위안소로 지정됐다.

이튿날 RAA 간부들은 황궁 앞에서 선서식을 갖고 “신일본 재건과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킬 초석 사업임을 자각, 멸사봉공의 결의를 다진다”고 선언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했다. 수백년 전통의 유곽에 이어 새로운 국책 매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국책 매춘의 양상은 도쿄도가 전후 처음으로 제정한 조례 성병예방 규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합군사령부(GHQ)의 요청에 따라 1945년 10월에 만들어 진 이 규칙은 점령군 병사를 상대하는 여성의 청결과 정기 검진 의무가 골자였다.

RAA의 위안소는 미군 진주와 함께 전국적으로 45개로 늘어났으며 위안부는 4,000여명에 달했다. 어차피 RAA 위안소는 백사장의 모래 한줌일 뿐이었다. 미군을 상대하는 사창 ‘요팡’(洋パン)은 순식간에 4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전쟁으로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젊은 일본 여성이 달러의 유혹을 떨치기는 어려웠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쿄 요시와라(吉原) 등 전국의 유곽이 전후 4개월만에 판잣집에 거적을 치고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군의 달러 덕분이었다.

이듬해인 1946년 들어 상황은 일변했다. GHQ는 1월24일 공창제도의 폐지를 명령했다. 공창제도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반하므로 이를 허용한 모든 법률과 명령, 규칙은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2월2일 전국 경찰에 ‘공창제도에 관한 지시’를 내렸고 2월20일 공창제도를 정식으로 폐지했다. 이때 인신매매 금지 규칙이 제정된 데서 알 수 있듯 그때까지도 유곽의 공창 등은 인신매매를 통해 공급됐다. 피폐한 탄광 지대나 흉작에 휩쓸린 농촌의 딸들이 알선꾼을 통해 1만~2만엔에 업소에 팔렸다. 가장 대우가 좋았던 은행원의 대졸 초임이 3,000엔이던 시절이다.

공창제도가 폐지됐다고는 하지만 수백년간 이어진 전통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유곽의 업소는 ‘특수음식점’으로, 창부는 ‘여급’으로 이름만 바뀌었다. 경찰 당국은 전통 유곽 지대를 지도 위에 붉은 선으로 표시해두고 이 지역에서의 매춘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적 자유 연애의 결과’로 해석하면서 묵인했다. ‘적선(赤線)지대’가 사실상 공인된 매춘지역을 뜻하게 된 것도 이때문이다.

반면 파란 색으로 표시한 ‘청선(靑線)지대’는 비공인 지역으로 경찰의 단속이 집중됐다.

패전후의 경제적 피폐로 곳곳에 늘어 선 거리의 여자를 제대로 단속하기란 처음부터 무리였다. 온갖 수법의 사창이 거리에 넘쳤다. 도쿄 우에노(上野)공원 일대의 숲에서는 성냥 한 개피가 탈 동안 ‘그곳’을 보여주는 ‘성냥팔이’, 풀피리 전문의 ‘나메야’, 나무를 붙잡고 선 채 치마 뒤를 올려주는 ‘다치보보야’(立ちボボ屋) 등 온갖 사창이 들끓었다. 야외 매춘인 ‘아오캉’이 유행한 것도 이때였다.

새로운 후조쿠 에이교(風俗營業)도 속속 등장했다. 1947년 1월 도쿄 신주쿠(新宿)의 한 업소는 젖가슴을 드러낸 채 깃털 부채로 하체를 살짝 가린 스트립쇼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아예 알몸을 모두 보여주는 스트립쇼가 번지는 가운데 경찰은 젖가슴과 배꼽, 무릎위 10㎝ 이상의 노출을 금지하고 나섰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한국 전쟁이 가져다준 호경기는 풍속영업에도 젖줄이 됐다. 1951년에는 손님이 등에 비누칠을 해 주는 ‘목욕쇼’가 신종 스트립쇼로 등장했다.

유부녀와 회사원, 대학생 등을 여급으로 고용한 ‘아루사로’가 1950년 오사카(大阪)에 처음으로 등장해 곧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아르바이트 살롱’(Arbeit Salon)이라는 일본식 조어의 준말이다. 1953년 도쿄의 ‘아루사로’에서 일하던 여고생 44명의 매춘 행위가 적발돼 충격을 던졌다. 현재 커다란 사회문제인 여고생 매춘이 이때 벌써 시작됐다. <계속>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0/07/1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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