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주)하나우리 이수원 사장

나이는 젊어도 산전수전 다 겪었다. 최근 ‘5만원 회비 무제한 제주도 여행’상품으로 화제가 된 (주)하나우리 사장 이수원(32). 1주일 매출액만 3억원대에 이르는 알짜 사업을 굴리고 있다.

벤처도 이런게 진짜 벤처가 아니냐고 은근히 어깨에 힘도 준다. 요컨대 거품은 커녕 기본이하에 가까운 최소의 밑천으로 최대의 수익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그랬다.

사업 첫달 지출비라곤 전단 인쇄비 20만원이 전부. 그걸로 2,000만원을 벌었다. 지금도 인쇄비와 직원 9명의 인건비외엔 별 지출이 없다.

사장실도 없이 직원들 사이에 대충 ‘빈대’를 치다가 손님이 오면 모신다는게 입구쪽에 놓인 허름한 원탁에다 딱딱한 철제의자다. 점심때면 자장면 불러먹기 딱 좋은 자리다. 고집은 세서 앞으로도 고급사무실을 쓸 생각도 없다. 그래도 궁색은 커녕 활기가 넘친다. 젊어서 좋긴 좋다. 어쩌면 늙어서도 여전할 것 같다.

벤처는 벤처라도 그는 좀 다른 벤처사장이다. 태어나기를 가난하게 태어나서 학교도 덕수상고 졸업장이 끝이다. 그 때문에 기죽은 적도 없고 앞으로 더 공부할 생각도 없다. 어려서부터 신문배달은 물론이고 주방장, 건축미장, 비디오점, 쌀집 배달원 등 안해본 일이 없다.


온몸으로 개척한 삶

책상앞이 아니라 온 몸 던진 ‘육탄전’으로 자기 길을 개척해 온 청년 사업가다. 어릴적 서울의 봉천동 달동네에서 살았다. 달동네중에서도 맨 꼭대기에 그의 집이 있었다. 아침이면 집집마다 몰려나와 공중화장실앞에 줄을 서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다섯 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씨는 3남매중 장남.

학창시절 대부분을 신문배달로 뛰었다. 극빈자인 그의 책가방을 비우게 한 뒤 학교식당의 쌀을 담아주시던 선생님, 학교 급식후 남은 라면도 얻어다먹던 형편이지만 창피하지 않았다. 병석에 누워계시던 어머니가 간간이 취로사업으로 받아오던 20kg들이 쌀부대가 그저 눈물겨울 뿐이었다.

열여덟살 때 어머니마저 암으로 잃었다. 임종은 원자력병원에서 맞았다. 한 국회의원 덕에 그럭저럭 병원까지 모셔가긴 했는데 막상 숨을 거두자 돈 150만원이 없어 시신을 찾아올 수 없었다. 돈을 구할 길이 없었다.

심지어 중학교때 재혼한 어머니의 남편, 양아버지도, 외가쪽 식구들도 서로 상대에게 책임을 떠밀기만 할뿐 팔짱을 끼고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장남 이씨가 울컥하고 말았다. “당신들 필요없어, 모두 가! 죽어도 당신들 얼굴 다시는 안 볼거야!”

얼마 안되는 집 보증금을 빼고, 가진 가재도구를 다 팔아 간신히 장례를 치렀다. 조금 남은 돈으로 가리봉동에 싼 방을 얻고, 여동생은 친척집에 가정부로 보냈다. 졸지에 어린 가장이 됐지만 먹고 살기가 두렵진 않았다.

이미 갖가지 아르바이트로 단련돼 있었다. 눈썰미 하나는 타고 났다. 집에서도 못 고치는 물건이 없는 걸어 다니는 전파사. 학생신분에 주방보조가 아닌 주방장으로 취직할 수 있었던 것도 남다른 재주 때문이다. 옆에서 하는 일을 한두번만 직접 해보면 금새 똑같이 따라하는게 특기.

처음엔 월급 18만원의 주방보조로 들어갔다가 주방장을 꼬드겨 자신이 갖고 있는 악기연주실력을 맞교습 해주는 조건으로 요리를 배웠다. 15일만에 마스터, 마침 다른 식당의 주방장 구인 의뢰가 들어오자 마자 곧바로 주방장으로 취직, 월급 45만원을 받고 살았다. 막노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 일당 2만원의 잡부로 들어간지 1주일만에 일솜씨를 따라잡아 일당 8만원을 받아냈던 그다.


쌀장사로 청년재벌 반열에

그럭저럭 모은 돈 30만원으로 헐한 자동차 한 대를 마련해 옷 도매상 배달기사도 해보았고, 20살 무렵엔 사당동 근처에서 도배나 장판을 깔아주는 인테리어 일로 제법 돈도 벌었다.

그러다 차라리 월급받는 직장생활이 속 편할 듯 싶어 나선 것이 쌀집 배달기사. 원래는 각 도매상에 배달만 해도 될 일을 직접 영업까지 뛰겠다고 자원했다. 애초에 받기로 한 첫달 월급이 120만원. 실제론 250만원을 받았다. 그가 온 뒤 150가마니에 불과하던 판매량이 한달사이 600가마니로 늘었기 때문이다.

“한남동에 대복상회라고 있었습니다. 그 가게에만 가면 언제나 쌀 100가마니씩 산같이 쌓여있을만큼 큰 도매상이었죠. 그만큼 새 거래를 트기도 어려운 곳이었는데, 결국 1주일만에 우리 거래처가 됐습니다. 비결이요? 인간적으로 다가가면 안 넘어갈 장사가 없습니다.

매일같이 들러서 청소도 해주고 무거운 쌀가마니도 예쁘게 쌓아주고, 그렇게 정성을 쏟았으니까요. 가자마자 우리 쌀 들여놓으란 얘기도 안합니다. 처음엔 눈도장만 찍고, 어떤 날은 더운데 물 한잔 달라고도 해보고, 그렇게 친해진 뒤에 제 얼굴봐서라도 우리 쌀 한번 써보시고 별 맛이 없으면 그냥 돌려주셔도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적인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 일을 맡기게 돼 있습니다.”

싸전 취직 한달만에 또 독립해버렸다. 스스로도 못말리는 기질이다. 역시 내 사업을 해야 성에 차는 팔자다. 주위에선 “나이도 어린 놈이 다닌지 한달만에 나간다”며 흉을 봤다. 보란 듯 6개월만에 성공했다.

쌀 도매상의 도매상 격인 왕도매상을 연 것. 연 매출 300억원대, 하루벌이만 300만원이 넘었다. 고교를 졸업한지 딱 1년뒤에 일군 성공이었다. 소유한 집만 8채, 최고급 외제차도 굴리며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내내 마음에 걸리던 동생은 일본 유학도 보내주었다. 적어도 5년동안은 그렇게 살았다.

1995년 농협의 부도사태가 발생하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햅쌀이 나오기 직전인 8, 9월은 쌀유통상으로도 고비. 그와 거래하던 농협 상당수가 쓰러지면서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처음엔 자신의 돈으로 급한 어음을 막아냈지만 그것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감당할 수 없었다. 17억원의 빚과 함께 부도. 그 잘나가던 20대 갑부가 하루아침에 거지꼴이 되었다.

“배신도 많이 당했습니다. 부도전엔 그렇게 죽고 못사는 사이처럼 친하던 이들이 제가 어려워지자 하루아침에 남처럼 구는겁니다. 부도 이후 가장 달라진건 이젠 전처럼 사람을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가 만나야 할 사람의 선이 확실히 그어지더라구요.”

막다른 골목에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폭력배 해결사들이 찾아와 흠씬 두들겨패던 날. 초주검이 되도록 맞다보니 나중엔 묘한 쾌감까지 들었다. 차라리 죽자 싶어 맞는 도중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문을 잠근 채 락스를 통째로 마셔버렸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폭력배들이 놀라 부랴부랴 119구조대를 불렀다. 급히 후송된 병원에서 가까스로 살아났다.

여관방에 들어 수면제 20정짜리 70통을 소주 한병과 함께 먹기도 했다.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보니 나흘뒤였다. 죽지는 않고 내리 잠만 잔 것이었다. 3일치 숙박비만 물고 나오며 다시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마땅한 거처도 없어 부도로 빚 진 한 사장집에 얹혀 살았다. 어찌어찌 다시 3억원을 빌려 수입 타이어장사를 벌였다.

당시 덤핑가에 팔리던 품목이었다. 타이어 3억원어치를 구매한 뒤 국내까지 들어오는 기간 2개월을 포함해 일부러 석달동안 물품을 풀지않고 가만히 쉬었다. 예상한대로 품귀현상이 빚어졌다. 그제서야 타이어를 팔기 시작, 비로소 덤핑가가 아닌 제값을 받게 되면서 고스란히 그 차익이 수중으로 들어왔다.

그게 ’유통’이었다. 괜찮은 장사였지만 더 끌지 않았다. 빌린 돈만 갚은 뒤 미련없이 정리했다. 현재의 사업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일이 그런 식이었다. 원래 작정했던 목표액만 달성되면 아무리 아까운 황금사업이라도 냉정하게 접었다. 정말 온 전력을 쏟고 싶은 사업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연이어 중고차 수출업을 벌이면서 부도시 부채 17억원도 마저 다 갚았다. 중고차를 싸게 사들여 잘 수리한 다음 외국에 되파는 일이었는데 뭣보다 좋은 매물을 신속히 확보하는 게 관건이었다. 벼룩시장 정보지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단 지면에 실리고 나면 이미 구매자가 나타나 한발 밀리는 것. 인터넷에선 똑같은 정보가 발행 하루전 미리 공개된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 뒤 남보다 앞서 매물을 사전장악했다. 2년만에 모든 빚을 갚고 끝냈다.


목표액 달성되면 미련없이 전업

그리고 작년 9월, 그렇게 기다려왔던 평생의 사업에 비로소 뛰어들었다. 여행전문업체인 지금의 (주)하나우리다.

내내 이 일을 위해 생각해 둔 아이디어가 많았고 앞으로 써먹을 것들도 수두룩 비축돼있다. 처음엔 단돈 5만원으로 횟수 제한없이 제주도 여행을 하게 해준다고 하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도무지 말이나 되는 소리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허황돼 보이는 구상이 실제로 가능한 것은 그만큼 유통의 생리에 밝은 이씨의 치밀한 계산능력 때문이다.

집단의 회원이 형성될 경우 항공료는 물론 모든 여행경비상 공동구매시 할인혜택을 다각도로 받을 수 있고, 특히 대기업과 연결, 사은품 형식으로 납품하게 되면서 또다른 안팎의 이익이 생기기 때문에 그로서나 소비자로서나, 또 연계기업까지 모두 ‘남는 장사’다. 현재 가입된 회원이 3,000명대. 전국 지점 14개에다 해외지사까지 준비중이다.

주변엔 든든한 동지들도 많다. 당장 같은 사무실안에도 봉천동 달동네 시절 옆집에 살았던 20년지기 형님이 동고동락중이다. 친구에 대한 의리는 어찌나 대단한지, 자신에겐 최고의 친구라며 어떻게든 죽마고우 권세진씨의 이름을 글 안에 넣어달라고 압력을 넣는다. 2년전엔 결혼도 했고 귀여운 아들도 가진, 헤비메탈광에다 야구를 좋아하는 싱싱한 30대 이씨.

하지만 7전8기의 이씨에게도 불가항력의 약점은 있다. 이상한 징크스 두가지. 하나는 신문광고만 내면 어김없이 비가 온다는 것. 아무리 멀쩡하던 날씨도 광고만 냈다하면 예보에도 없던 비가 쏟아진다.

비오는 날은 신문판매부수가 바닥이라 광고도 하나마나. 그 바람에 작년에도 헛 돈이 되고만 광고비 1억원을 갚느라 애꿎은 장인의 소 판 돈, 처남의 집 살 돈, 처제의 카드까지 빌어썼다. 한동안 처가에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악몽의 8월, 올핸 어떻게 넘길지...

8월도 앙숙이다. 한번도 곱게 넘어가는 8월이 없었다. 작년만해도 돈까스점을 열었다가 8월에 털어먹었고, 부도를 맞은 날도, 비디오점을 열었다가 한달만에 폐업한 날도, 여의도 둔치공원에서 20대 1로 오토바이 폭주족들에게 두들겨 맞고 응급실에 실려간 날도 모두 8월의 일이다.

몇주뒤면 또다시 8월. 올해는 괜찮을까. “그러게요. 또 뭔 일을 치를지 8월만 되면 떨린다니까요. 하지만 더 이상 별 일 있겠어요. 웬만한 큰 사고는 거의 다 치뤘으니 뭐…”

요컨대 사고에도 면역이 생겼다는 소리다. 매도 일찍 맞는 게 그래서 낫다.

입력시간 2000/07/11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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