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의 환호 뒤엔 '매' 있었다

심각한 선수체벌, '엘리트스포츠' 개념 바뀌어야

‘선수와 북어는 때려야 말을 듣는다.’

한때 매를 잘드는 사람이 유능한 감독이고 선수는 역시 맞아야 플레이가 달라진다는 말이 정설로 통하던 때가 있었다. 이 말은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유효할까? 선수들은 ‘아니다’라고 완강히 부정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대답은 역시 ‘그렇다’이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높다.

근세이후 이성의 힘이 세력을 얻으면서 ‘폭력은 야만적’이라는 등식이 확립됐지만 인간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며 폭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데 대해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스포츠에서 폭력은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선수가 심판을 폭행하는가 하면, 선수와 선수간, 관중끼리의 폭력사태는 지금 이순간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사랑의 매'로 위장한 스포츠 폭력

전문가들은 전체주의 국가나 우민화 정책이 통하는 사회, 스포츠를 통해 신분상승이 확실히 보장되는 사회일수록 스포츠에서 폭력이나 약물사용(스포츠계에서는 약물도 폭력만큼이나 위험한 일탈행위로 간주한다)이 빈발하게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일제치하의 군국주의와 1980년대 스포츠붐을 경험했으며 최근 박찬호, 박세리 등 스포츠재벌이 탄생한 한국은 신통하게도 이같은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아직도 “조선놈(선수들)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는 개탄스런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일제시대 한국인의 민족성을 폄하하기 위해 일본인이 퍼뜨렸다는 이 말은 반세기가 다 되도록 맹신자를 길러내고 있으며 이 말은 ‘사랑의 매’로 위장한 채 성인스포츠조차 좀먹고 있다.

한국에서 선수체벌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92년 1월 제9회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에 출전한 한 여자팀이 온나라를 발칵 뒤집어 놨다. 이틀전 경기에서 성의없는 플레이를 펼쳤다는 이유로 팀 코치가 선수들을 폭행하는 바람에 선수들이 허벅지에 시퍼렇게 피멍이 든 채로 경기장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실업팀 선수들은 체벌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남자가 아닌 여자선수들까지 야만적 체벌을 당할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스포츠와 폭력에 관한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이 논란은 어디까지나 실업팀 선수들에 한정된 것이었다. 대다수 중·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에서도 매가 없이는 선수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 여전히 진리처럼 통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다된 최근 여자프로농구 현대건설구단의 J감독이 역시 불성실한 경기를 펼쳤다는 이유로 선수를 폭행, J선수의 고막을 터지게 했다.

고막이 찢어지면 보통 4주이상의 진단이 나오는 중상. 일반적이라면 당연히 고소고발이 뒤따랐겠지만 이 구단은 폭행당사자인 감독에게 일정기간 출장을 금지시키는 것으로 제재를 마무리했다. 즉 스포츠에서는 ‘폭력이 필요악’이라는 견해를 인정했기 때문에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두들겨 펴맨 펄펄 난다"

20년만에 사회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긴 하지만 스포츠계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이순간에도 어디선가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나오는 것은 100% 사실이다.

매를 잘 들기로 유명한 한 축구감독의 진술은 되새겨볼만 하다. “전반전에 나사가 빠진 듯이 플레이하는 선수가 있으면 하프타임때 흠씬 두들겨 팬다. 매를 맞고 나면 후반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호같이 달리며 호흡을 착착 맞추는데 신기할 정도다. 그러니 어떻게 매를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국 스포츠계에서 이같은 생각에 절대적으로 호응하는 지도자들로 축구에서 P감독, 야구에서 K, P코치, 농구에서 Y, K, P감독 등이 꼽힌다. 비인기종목까지 포함하면 이 범주에 속하는 지도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렇다면 체벌을 즐겨하는 지도자들이 프로무대까지 점령하며 살아남는 이유는 뭘까.

한국체육대학 사회체육학과장 김사엽(45)교수는 “스포츠는 스포츠맨십과 승리지상주의라는 상대적인 가치가 충돌한다”고 전제, “도덕적 토대가 약한 나라일수록, 또 스포츠재벌이 가능한 사회일수록 승리지상주의가 득세하게 되며 이 때 체벌이 훌륭한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밝혔다.

김교수는 “선수가 잘되면 지도자도 따라서 잘되기 때문에 비용에 비해 효과가 큰 매를 상용하게 된다”면서 “하지만 선수가 체벌에 익숙해지면 이같은 반짝효과는 쉽게 없어지며 그때부터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고 개탄했다. 지도자들의 폭력은 선수가 잘되기만을 바라는 사랑의 매로 호도돼 용인되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현역 프로농구 코치인 L씨의 입장도 비슷하다. L씨는 “고교, 대학때 정말 지겹도록 맞았다. 그러나 매때문에 훨씬 나은 플레이를 펼쳤다고 생각한 경기는 한번도 없다”고 회고했다. 그는 “매는 마약과도 같다. 한번 맞는데 길들여진 선수는 맞아야 뛴다.

그러나 이런 선수들은 타의적으로 뛰기 때문에 대부분 단명하고 반대로 훌륭한 선수들이 매때문에 운동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면서 “매는 도움보다는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단언했다.

지도자의 폭력은 대상학생에게 그치지 않고 확대재생산 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를 갖고 있다. 체벌이 잦은 지도자 밑에서 큰 선수들은 쉽게 체벌을 하게 되며 이 악순환은 점점 많은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폭력에 대한 용인은 선수나 선수를 친구로 둔 학생들에게 폭력에 대한 불감증을 야기해 범죄유혹에 빠뜨리거나 일탈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후유증을 낳기도 한다.


지도자 폭력, 악순한 되풀이

대안은 있다. 1960년 동독의 스포츠국력화에 위축되기는 했지만 서독은 63억만 마르크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골든 플랜’이라는 계획을 성사시켰다.

엘리트스포츠가 아닌 동호인→전문선수→국가대표라는 자연스런 단계를 형성시켜 ‘억지로가 아닌 좋아서 하는’ 스포츠 원래의 정신을 정착시킨 것이다. 이 골든플랜은 이름만 달라졌을뿐 선진 여러나라에 이미 뿌리를 내렸다.

우리 체육계도 이같은 개념을 도입했지만 정착여부는 아직 요원하다. 하지만 ‘때려서 키운’ 선수가 ‘즐겁게 운동하는’ 선수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따라서 앞으로는 플레이를 즐길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사회, 또 그런 형의 지도자가 훌륭하다는 소리를 들을 날이 곧 찾아올 것으로 체육계는 믿고 있다.

이범구 체육부기자

입력시간 2000/07/18 22:53


이범구 체육부 lbk1216@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