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성동구 두모포(豆毛浦) 62-1

두모포는 성동구 옥수동의 옛 이름으로 본디 ‘두뭇개’라고 불렀다. 두뭇개란 한강과 중량천의 ‘두 물이 서로 어우러지는 개(물)’라는 뜻으로, ‘두물개→두뭇개→두무포→두모포(豆毛浦)’로 소리빌림(音借)된 것이다.

그 뒤 일제 때는 이곳에 있던 옥정수(玉井水)라는 유명한 우물이 있어 그 이름을 따 ‘옥정수골’이라 하다가 광복 뒤 옥수동(玉水洞)으로 한 것이 오늘의 땅이름이다.

두모포의 유래는 그렇다치고 두모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조 명종(明宗)이 나이 어려서 왕위에 오른지라 문정왕후(文定王后:中宗의 계비)가 섭정하면서 그 살붙이인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말하자면, 파평 윤씨의 세도가 하늘에 닿아 있을 그 무렵이다. 그때 윤원형의 기생첩 정난정(鄭蘭貞)은 윤원형의 본부인을 내쫓고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돼 권력을 믿고 많은 재물을 긁어모아 축재를 하였다.

난정은 매년 두세번씩 2~3섬의 밥을 지어 말에 싣고 두뭇개에 와서 물고기에게 던져주곤 하였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성들의 먹을 음식을 빼앗아 물고기에게 먹이로 주니, 이는 마치 까마귀에게 송장을 빼앗아 개미에게 준다는 옛 말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라고 빈정거렸다.

또 명종 20년(1565년) 두뭇개 어부가 앞 강에 쳐놓은 그물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그 크기가 웬만한 배(船)만 하였다. 이에 어부가 잡은 고기를 조정에 바치니 모두들 큰 이변이라 하였다.

이때 성균관 유생 한 사람이 비웃으며 말하기를, “저 큰 물건이 스스로 먹을 것을 찾지 못하고 대감의 먹이를 탐내어 바다로부터 멀리 와서 어부에게 잡혔으니 불쌍하도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그 고기가 바다에서 멀리 나와 강에 이르러 죽었으니 이것은 필시 윤원형의 ‘형’(衡)자가 ‘행’(行)자와 ‘어’(魚)자로 조합되어 있어 ‘고기가 간다’는 뜻이다. 이 고기가 죽은 것은 윤원형의 죽을 징조”라 하였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세도가가 끼친 권력지수(權力指數)에 반한 민원의 표출인 것이다.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해에 문정왕후가 돌아감으로써 한 시대를 풍미하던 치마자락 정치(섭정)는 막을 내리고 만다.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문정왕후의 친정 살붙이인 동생 윤원형도 그의 기첩 정난정과 함께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더니 황량한 문산벌 어느 주막집에서 자살로서 삶을 마감한다. 그래서 역사는 영원한 양지도, 음지도 없다고 했던가.

중량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두모포 여울엔 닥섬(楮島)도 사라지고 한강을 오르내리는 유람선의 뱃고동 소리가 이따금 정적을 깬다. 두모포 여울을 끼고 중량천을 뛰어오르는 잉어 무리가 떼죽음을 하니 윤원형(尹元衡)의 ‘형’(衡)자를 탓하랴!

<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0/07/19 17:22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