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목에 방울 단 판·검사

"사법부 독립" "정치적 중립" 주장, 조직내 논쟁에 불 지펴

판결문이나 공소장으로만 말한다던 판·검사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그것도 자신이 속한 조직의 수뇌부를 직접 겨냥해 사법부 독립과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동안 국민에겐 엄격했지만 조직비판에는 물렀다는게 법원·검찰에 대한 일반적인 평.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는 의외로까지 들린다.

법원, 검찰내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자신들의 말처럼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라는 조직비판 발언의 경위를 살펴보자.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와 검사장이상 고위간부 인사가 각각 마무리되던 7월 7일과 14일. 법원과 검찰의 내부통신망엔 ‘대법관 임명제청 방식의 개선을 바라며’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한 제언’이란 제목의 글이 조용히 올랐다.

주인공은 386세대인 서울고법의 정진경(鄭鎭京·37·사시27회) 판사와 서울지검 동부지청의 은진수(殷辰洙·39·사시30회) 검사.

정 판사는 법원내 진보적 소장판사들의 법이론 연구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원으로 사법부 독립과 사회현안에 대한 활발한 글쓰기로 유명한 법원내 ‘논객’이다. 은 검사는 사시와 함께 행정고시 재경(財經)과와 공인회계사 등 고시 3과에 합격한 수재로 1993년 서울지검 재직시 홍준표 검사와 함께 슬롯머신 비리 수사를 맡았다.


대법관 임명 방식에 직격탄

정 판사의 글은 현재 조회건수가 2,000여회를 상회할 정도로 일선 법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동안 막강한 대법원장의 권위에 억눌려 일선 법관들은 함부로 꺼내기 어려웠던 대법관 임명방식 등 근원적인 시스템에 직격탄을 날렸기 때문이다.

정 판사의 문제 제기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스스로도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지 않아 정치적 영향을 받기 쉬운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를 임명제청하는 것은 사법부 독립에 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출직인 대통령과 국회의원처럼 사법부 최고법관인 대법원장, 대법관 임명에도 민주적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

현행 헌법은 대법관 임명과 관련, 대법원장이 대통령에게 후보자를 임명제청하고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이같은 헌법규정은 1972년 유신헌법이후 생긴 것으로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재야법조계의 비판을 받아왔다.

그는 사법사상 최초로 이뤄진 대법관 인사청문회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동의에 회부한 인사를 여당에서 문제삼기는 어려워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신 그는 ‘최고법관 추천회의’를 개선책으로 내놓았다. 최고법관 추천회의의 구성은 경력10년 이상의 법관을 절반으로 하고, 나머지는 변협, 검찰, 법학계, 시민단체 등 외부기관 대표로 총 30~50명으로 하되 이 회의에서 공론화를 거쳐 대법관 후보를 선정하자는 제안이다.


“검찰 독소조항 폐지하라”주장

은 검사도 정 판사와 마찬가지로 제도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항상 원칙과 기본에 입각한 검찰권 행사를 부르짖어 왔지만 여전히 국민의 불신을 사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가로막는 독소조항을 폐지해야 한다는 취지다.

은 검사는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검사가 차관급이상 공무원과 국회의원 등을 구속할 경우 법무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 법무부 예규를 들었다. 그러면서 이 예규가 모법(母法)인 검찰청법 8조에 위반되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검찰청법엔 법무부장관은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해선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예를 들어 장관은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단호히 척결하라’는 식의 일반적인 지시를 할 수 있지만 개개의 사건과 관련, 특정 정치인을 구속하라, 말라는 식의 구체적인 지시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법무부 예규는 법으로 금지된 특정인의 구속여부를 승인조항으로 둔 것이다.

은 검사는 검찰전체사건의 1%도 되지 않는 정치적 사건의 처리에 법무부 예규가 개입한 사례를 두가지 들었다. 첫째는 모 국회의원이 시의원으로부터 공천대가로 1억원을 받은 혐의로 모 지검에서 압수수색을 실시했으나 당시 법무부장관이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사실상 수사를 중단시켰다는 사례. 둘째는 모 국회의원에게 돈을 건넨 사람을 구속했으나 당사자인 국회의원에 대해선 장관의 지시로 불구속기소했다는 사건.

당시 언론보도를 통해 이 두 국회의원은 여권의 L, K의원이라는 설이 나돌았으나 은 검사는 “당사자의 명예를 고려,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전화통화에서 밝혔다.


조직내 반대여론 불구, 소신 확고

내부열람용으로 작성된 두 판·검사의 글이 언론에 알려지자 조직내부에선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았고 심지어는 작성자 개인을 폄하하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일선 부장판사들은 “법관추천회의는 법관들의 줄서기 등 부작용이 커 이미 폐기한 안(案)”이라며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일부 검사들은 “은 검사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판·검사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확신에 차있다.

정 판사는 언론보도후 “초임판사 시절 자기 판단을 고집하며 부장판사와 싸움을 벌이기도 했던 나에게 아무런 불이익을 주지 않은 사법부의 자유로움을 사랑한다”며 “법과 권위의 상징인 최고법관이 국민에게 신뢰받을 수 있는 길을 고민하다 글을 올린 것”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또 “사법부 독립과 민주적 정당성의 확보가 거스를 수 없는 대의라는 점은 동료 법관들과의 폭넓은 의견 교환에서 나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은 검사도 “검찰지휘부 못지않게 일선 검사인 나도 검찰을 몹시 사랑한다”며 “하지만 사랑하는 대상은 같아도 사랑하는 방법은 다를 수 있다”고 고심의 흔적을 드러냈다. 두사람은 모두 기자들의 취재요구에 선선히 응하고 자신의 취지를 분명히 전달하려 했다.

두사람이 속한 조직은 지금까지 여러차례 조직이 뿌리째 흔들리는 법조파동을 겪어왔다. 사법부는 1971년, 88년, 93년 세 차례의 사법파동을 겪었다. 2차 사법파동 때는 김용철(金容喆) 당시 대법원장의 퇴진 서명운동까지 벌어졌었다.

검찰도 98년 대전법조비리와 지난해 옷로비 의혹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두사람을 포함한 일선 판·검사들은 묵묵히 산더미같은 기록들과 씨름하느라 야근을 밥먹듯이 해왔다.

이들의 주장이 일반인들에겐 한낱 공허한 법원·검찰조직내의 논쟁으로 비칠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고언이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겐 약한 그래서 인과응보가 실현되는 진정한 법치주의의 실현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의 주장에 법원·검찰 수뇌부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주목되는 이유도 이들의 충정때문이다.

손석민 사회부 기자

김영화 사회부 기자

입력시간 2000/07/26 12:08


손석민 사회부 herme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