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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한국정치판의 '큰손?'

정치권 들쑤신 '북한의 야당·언론 비판', 정부대응도 어정쩡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단순히 ‘은둔’에서 끌어내는데 그치지 않았다. 6·13 정상회담 이후 김정일은 남한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공개적 변수로 등장했다. 일부에서는 김정일이 한국 정치판의 ‘큰 손’이 됐다는 비아냥 섞인 비난도 마다 않고 있다.

김정일과 북한 관영통신의 발언 하나하나가 국회파행까지 초래하는 마당이고 보니 국민 역시 헷갈리는 인상이다.

김정일(또는 북한)이 남한 정치의 공개적 변수가 됐다는 사실은 일단 인정해야 할 상황이다. 동국대 정치학과 황태연 교수는 6·15 남북 공동선언이 상호관계와 상호영향을 공식화했다는 관점에서 이것을 긍정한다.

황 교수의 이야기.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는 공동선언에서도 드러나듯이 남한만의 정치가 아닌 ‘한반도 정치의 개막 단계’로 바뀌었다. 남북 공동선언문은 민족경제 균형발전과 각 부문간 교류 등을 담고 있다. 문서상으로도 남한은 북한까지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짜는 것이 의무가 됐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정책이 북한에 영향을 미치고, 그 역도 성립한다. 남북상호간의 영향은 이제 불가피해졌다.”


남한 흔들기인가 과민반응인가

상황적으로 상호영향이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이 한국 정치판의 ‘큰 손’이 됐다는 비난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북한이 의도적으로 남한을 흔들어대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남한내 일부의 과민반응 때문일까. 둘 다 아니면 남한의 자중지란 때문일까.

‘김정일 큰 손론(論)’이 제기된 것은 표면적으로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차별적 행동과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자세에서 비롯됐다. 북한의 차별적 행동이란 남한의 각 정치·사회세력을 선별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이른다.

북한 관영 중앙통신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반통일 분자’‘…놈’이란 극단적 용어를 사용하며 성토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부 신문을 반통일세력이라며 폭파 운운한 것도 동일선상에 있다.

이같은 북한의 태도는 따지고 보면 과거에 비해 특히 새로울 것도 없다. 문제는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여당의 대응이었다. 청와대는 북한의 이 총재 공격에 양비론적인 논평을 내놓았다. ‘북한도 잘못했지만, 이 총재도 잘한 건 없다’는 식이었다.

이한동 총재 역시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북한의 행위를 “망발”이라고 했다가 뒤늦게 “야당의 주장에 밀려 의미가 와전됐다”는 식으로 흐지부지 넘어갔다. 어쨌든 정부·여당의 태도에서는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노력이 분명히 보인다.

청와대의 양비론은 급기야 한나라당을 격발시켜 ‘친북세력’이란 역공을 내놓게 했다. 보수진영은 한발 더 나아가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에 뭔가 약점이 잡혀도 단단히 잡혔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유민주민족연맹 이철승 총재의 이야기.

“청와대의 양비론은 (북한에)약점을 잡혀서 한 망발이다. DJ가 독단적으로 햇볕정책을 추진하다가 김정일에 발목을 잡힌 게 틀림없다. 청와대의 태도는 북한이 카드를 쥐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그는 DJ 정권이 북한의 흔들기에 무력하게 당하고 있다고 본다.


“남한체제 결속 우선돼야”

황태연 교수도 청와대의 양비론이 잘못됐다며 청와대와 북한에 동시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6·15 공동선언의 암묵적인 전제는 책임있는 당국이 쌍방내정을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기관인 중앙통신이 야당 총재와 조선일보를 비판한 것은 남한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처사로 정상회담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북한 체제의 약점이기도 하다. 청와대의 양비론은 이런 점에서 잘못됐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한 체제의 결속이 우선돼야 한다.”

황 교수는 그러나 북한이 ‘남한 흔들기’를 한다 하더라도 과민반응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더욱이 김정일과 북한이 남한 정치의 큰 손이 됐다는 의미는 맞지 않다고 말했다. 큰 손이기에는 북한이 무력하고 남한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것이다.

일부의 과민반응에 대해서도 정상회담으로 인해 정국 주도권을 뺏긴 야당의 위기감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남북간 교류방식을 놓고도 ‘큰 손론’이 도마 위에 올라있다. 보수진영은 DJ가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중국식 국공합작)에 말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한다며 비난하고 있다. 이것은 평양 정상회담이 김정일의 감독, 각본, 연출에 따라 이뤄졌고 DJ는 들러리선데 불과하다는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북한의 인권은 언급도 못하고 북측의 요구만 들어주기로 한게 증거라는 것. 보수진영은 햇볕정책이 김정일의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남한의 (체제방어)외투만 벗겨 국론분열을 초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북한이 현정권을 위협해 대규모 양보를 받아내는 이른바 ‘신북풍’의 공산도 없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다.

황 교수는 이에 대해 김정일의 유일한 선택은 개방 뿐이라며 북한에 대해 일대일 주고받기식의 ‘완벽한 상호주의’는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은 동포이자 적이기 때문에 완벽한 상호주의와 아낌없이 주는 것의 중간단계인 ‘탄력적 상호주의’로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는 북한의 변화를 국공합작의 통일전선전술로 보는데도 반대했다. 세계사적, 한반도적으로 체제경쟁이 남한의 승리로 끝났고, 이에 따라 북한이 스스로 변하려 하고 있는데 여기다 시간벌기 전술인 국공합작론을 갖다 붙이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대북정책 국회역할 강화 급선무

큰 손론와 남한 흔들기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는 데는 정부 당국자의 책임도 크다. 가까운 예가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의 말이다. 황 수석은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이 남측 대학가의 인공기 게양 문제와 관련해 검찰의 사법처리에 항의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발언은 진위야 어째됐든 DJ 정부가 북한 카드를 내정에 활용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행정부의 대북정책 독점, 나아가 정권 재창출 전략과 대북정책이 연관돼 있다는 의혹이다. 이른바 파워게임과 맞물린 남한의 ‘자중지란론’이다.

이같은 측면에서 ‘큰 손론’을 대북정책이 아니라 국내정치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양대 정치학과 임성호 교수는 현정권이 남한내의 다양한 시각과 불만을 아우르는데 미흡하다고 말했다.

임 교수의 이야기. “남북 정상회담 변수로 인해 행정부의 독점적 지위가 강화될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남북대화 이니셔티브는 대통령이 취했지만 앞으로 혼자서 한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무엇보다 대의정치의 근간인 국회라는 공론장에서 여론을 조성하고 수렴해야 한다.”

임 교수는 또 단기성과를 내려는 욕심이 과정상 비밀주의, 의외성, 급격성을 불러 일부에서 불안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대북정책에서 국회가 소외되는데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의 경우 대외정책에서 의회 카드를 교묘히 이용해 국면을 이끌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국회 카드를 활용하기는 커녕, 오히려 방기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국회카드는 이뿐 아니라 우익의 반발을 비롯한 국론분열을 완화하는데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남한 정치에 대한 ‘김정일 큰 손론’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다.

큰 손론이 배태되는 토대인 ‘북한의 남한 흔들기’‘남한의 과민반응’‘남한의 자중지란’도 제각기 다소간의 근거를 갖고 있다. 분명한 것은 내부의 수용자세와 준비에 따라 외부의 충격이 전혀 다른 효과를 미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큰 손론의 1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seapower@hk.co.kr

입력시간 2000/07/2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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