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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독주시대] 세월 앞에 꺾이는 '아날로그 경영자들'

21세기 디지털 경영시대에 흔들리는 원로 재벌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를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은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졔 몬져 알고 즈럼길노 오더라.’

고려 말기 유학자인 우탁(禹倬·1262~1343)이 지은 시조이다. 고시(古詩)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도 세월이 흘러 덧없이 늙어감을 한탄하는 ‘탄로가(歎老歌)’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우탁의 탄로가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현명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세월앞에서 무기력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요즘 재계에서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 재계를 이끌었던 정주영(86)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 조중훈(81) 한진그룹 회장, 신격호(79) 롯데그룹 회장 등 원로 경영자에게서 고령의 한계가 역력하다는 의견이 흘러나오고 있다. 와병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삼성을 탄탄대로로 이끌고 있는 이건희 회장과 비교할 때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카리스마는 없다

우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그는 불과 1년전만 해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온전히 달성한 것처럼 보였다. 1947년 현대토건으로 출발, 국내 1위의 현대그룹을 일궈낸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인물로 통했다.

실제로 정 전 명예회장은 1950년대와 1980년까지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따라서 ‘사업상의 기회’가 열려 있는 곳에 과감히 투자, 성공을 이끌어냈다. 그가 1950년대 건설업에 손을 댄 것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 땅에 가장 필요했던 것이 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시설을 만드는 건설산업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또 한강인도교 공사, 1968년 세계 최단시간 완공이라는 기록을 세운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1976년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등은 정 전 명예회장 특유의 ‘밀어붙이기’식 스타일이 빛을 발한 대표적 성과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제는 그 누구도 자신있게 “정 전 명예회장이 탁월한 경영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경영일선에서 퇴진한 그가 아직도 현대그룹 대주주로서 막강한 입김을 행사하고는 있으나, 이제 그의 언행에서는 더 이상 과거의 ‘카리스마’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이끌던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으로 분열위기에 빠졌고, 현대그룹의 모태나 다름없는 현대건설을 둘러싼 ‘자금위기설’은 현대그룹 전체로 번질 기세이다.

A증권의 채권담당자는 “ 위기설이 나오는 현대건설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이 여의도나 명동 사채시장에서 C급 수준인 30%가 넘는 할인률로 거래되고 있다”며 “현대그룹의 자금사정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시대의 흐름 간파 못해 사태 키워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도 비슷한 상황을 맞고 있다. 신회장은 여든을 바라보는 노령임에도 불구, 아직까지는 재계에서 탄탄하기로 소문난 롯데그룹의 경영권을 확실하게 행사하고 있다.

그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2월, 4월, 6월 등 짝수달에는 한국에서, 홀수달에는 일본에서 지내는 등 한·일 양국을 오가며 회사를 경영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신회장은 또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고 불시에 현장을 방문하는 특유의 꼼꼼함으로 부하 직원들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

롯데그룹의 한 관계자는 “신회장이 한국에 머무는 짝수달에는 롯데호텔 임직원들이 바짝 긴장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신회장이 아무런 예고없이 숙소인 롯데호텔 지하의 각 매장을 방문, 종업원의 근무태도를 점검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신회장의 과도한 카리스마 때문에 롯데그룹은 심각한 이미지 실추를 경험하고 있다. 신회장의 노조에 대한 강경 입장과 맞물려 벌어진 6월29일 롯데호텔 파업노조에 대한 경찰력 투입때문이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롯데그룹은 이번 파업으로 400억~500억원의 손실을 냈지만 더욱 큰 손해는 서비스 업체로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이미지가 실추됐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신회장은 세상이 바뀐 줄도 모르고 노사관계에서 70~80년대식의 대응으로 일관하다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미 폭풍이 지나갔지만 한진그룹도 최고경영자인 조중훈 전 명예회장이 예전 같은 판단력을 보이지 않아 위기를 자초한 사례이다. 한진그룹은 지난해 국세청으로부터 사상 유례없는 3개월간의 세무조사를 받고 5,416억원의 세금을 추징당했다.

당시 국세청은 서울지방국세청 조사인력의 대부분인 250명을 투입, 한진그룹을 샅샅이 조사한뒤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 일가가 1조895억원의 소득을 은닉했으며 이에 따라 5,416억원의 세금을 추징했다”고 발표했다.


판단 착오로 그룹 최대위기

하지만 한진그룹 내부에서는 비록 공개적이지는 않지만 ‘충분히 예방할 수 있던 사태가 최고경영자의 판단 착오로 확대됐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정부는 대대적인 세무조사에 착수하기전 대한항공 항공기의 잇딴 추락에 따른 국가 이미지 실추를 이유로 조중훈 회장 일가의 퇴진을 우회적으로 요구했으나, 잇따라 거절당했다.

당시 재계에서는 1992년 대선때 당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조중훈 회장이 현 정부와 감정적으로 맞서고 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한진그룹 관계자는 “국세청이 세무조사에 착수한뒤, 처음에는 ‘정치적 탄압’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국세청의 강경한 입장을 확인한뒤 사실상 백기투항을 했다”며 초동대응상의 실수를 인정하고 있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요즘 한진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대한항공은 자산, 매출액, 비행기 보유대수 등 모든 면에서 ‘3분의1’수준에 불과한 아시아나항공의 시가총액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다.

원로 경영자들이 총기 잃은 모습에 대해 재계에서는 “70~80년대 밀어붙이기식 경영에 익숙했던 경영자들이 디지털과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21세기 경영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원로들의 막강한 카리스마때문에 부하들이 직언을 하지 못하는 것도 또다른 요인”이라고 말했다.

한때 컴퓨터와 인터넷을 지독히 미워했으나 이제는 제너럴 일렉트로닉(GE)그룹 인터넷 사업을 진두지휘하는 잭 웰치 회장이나 인터넷 부문을 아들인 이재용씨에게 넘겨준 삼성그룹과 ‘예전같지 않은’ 한국 원로 경영자들의 모습이 크게 대비된다.

조철환 경제부기자 ·chcho@hk.co.kr

입력시간 2000/07/2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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