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담배회사 수난시대, 흡연피해 천문학적 배상판결

“담배회사 입장에서는 단지 돈이 걸린 문제이겠지만 수백만 흡연자들에게는 생명이 걸린 문제이다.”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고등(순회)법원이 7월14일 5개 담배회사에게 1,450억달러(116조원)라는 사상 최고 배상금 평결을 내린 직후 레이튼 파인건 수석 배심원은 이같이 밝혔다. 원고측 변호인인 스탠리 로젠블라트는 “흡연자들이 지난 40~50년동안 겪은 고통의 일부를 보상받을 수 있게 됐다”며 반겼다.

마이애미 고법의 평결은 천문학적인 배상액 규모와 70만여명에 달하는 원고의 수 뿐 아니라 향후 다른 나라에 미칠 파장 때문에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 평결은 과거 알래스카 해안 기름유출로 50억달러의 피해보상을 한 엑슨사나 캘리포니아 차량 화재사건으로 48억달러의 배상을 한 제너럴 모터스(GM)등 기존의 재판 사례와도 비교조차 되지 않는 규모이다.


각국서 미국회사 상대 소송 봇물 예상

미국 흡연자들의 승소 소식이 전해지자 각국에서 이와 유사한 소송이 잇따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영국 금연운동 단체인 ‘흡연과 건강 운동’(ASH)의 클리브 베이츠 이사는 “지난해 담배회사와 소송을 벌여 패소했지만 미국 흡연피해자들이 승리함에 따라 영국의 흡연피해자들도 소송을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브라질의 고이아스주(州)는 지난해 10월 미국 담배업계를 상대로 수십억달러의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했으며 볼리비아, 니카라과, 파나마, 베네수엘라 등도 소송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마이애미 고법 평결로 미국 담배회사중 시장점율이 가장 높은 필립 모리스(말보로, 버지니아 슬림 등을 생산)는 739억6,000만달러, R J 레이널즈(카멜, 윈스턴) 362억8,000만달러, 로릴러드 타바코(뉴포트) 162억5,000만달러, 브라운 윌리엄슨 175억9,000만달러, 리젯그룹 7억9,000만달러를 배상해야 한다. 배심원단은 이밖에 이들 담배회사의 지원금을 받는 담배연구협회와 담배연구소에 각각 19억5,000만달러와 27만8,000여 달러의 손해배상금을 부과했다.

미국의 담배소송은 1983년 폐암으로 숨진 로즈 치폴론(여) 유족이 처음 리젯그룹을 상대로 피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이후 메이저 담배회사와 피해자간 공방이 계속돼왔다.

당시 치폴론측은 담배회사가 담배의 유해성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켜 1심에서 40만달러 배상판결을 받아냈으나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소송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소를 취하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46개 주정부들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흡연피해 주민들을 위한 의료비 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집단 소송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주정부들은 1994년부터 4년여동안 소송을 벌이다 1998년 11월 담배회사들이 주민의료비로 2,500억달러를 25년간 분할 지불하겠다는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보상금 지불능력 등 문제점 많아

이번 마이애미 고법의 평결에 따른 배상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걸림돌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 5개 담배회사들이 과연 1,450억달러라는 배상금을 지불할 정도의 재정능력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담배회사측 변호사들은 “이번 평결은 담배회사들에 대한 실질적인 사형선고”라며 반발하고 있다.

플로리다주 법은 회사를 파산시킬 정도의 배상을 금하고 있어 이번 평결로 해당회사중 어느 하나가 도산할 경우 문제는 한층 복잡해질 수 있다. 담배회사측 변호인들은 회사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1억5,000만~3억7,500만달러의 범위를 벗어나는 배상판결은 담배회사의 파산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필립 모리스사 변호인단에 속한 댄 웹은 “이번 배상액은 담배회사 전체를 10번 이상 도산시킬 수 있는 규모”라고 주장했다. 담배회사측은 1998년 주정부들과의 일괄타협안을 내세우며 마이애미 고법의 평결이 이중징벌이라고 반발했다.

둘째, 평결의 합법성 문제이다. 업체 변호인단은 흡연자의 피해정도나 담배업체들의 사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집단소송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R J 레이놀즈사(社) 수석 부회장인 돈 도나휴는 “마이애미 집단소송은 절차상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며 항소의사를 밝혔다. 뉴욕 브루클린 법대의 안토니 J 세복 교수는 “70여만명이 제기한 이번 소송은 절차상에 많은 하자를 안고 있어 항소 과정을 통해 벌금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며 담배회사측 주장에 동조했다.

그러나 흡연피해자 변호인단은 이번 판결에 앞서 내려진 앞선 판례들을 내세우며 항소법원에서 역시 승리할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마이애미 법원이 흡연관련 집단소송을 다룬 것은 이번이 세 번째 케이스.

지난해 7월 마이애미 고법은 담배회사들이 암 심장질환 등 29개 질병을 유발시키는 중독성 제품을 생산하는 데 공모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어 올 4월 흡연으로 인한 질병 피해자 3명이 5개 담배회사를 상대로 낸 집단소송에서 “담배회사들은 원고측에 1,270만 달러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셋째, 담배회사들이 지연전술을 펴고 있다는 점이다. 담배업체들은 항소를 통해 판결을 번복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배상액수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지금까지 총1,850건의 담배피해배상 소송이 있었지만 피해보상이 집행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주정부들과 5개담배회사간 합의를 본 흡연주민 의료비 2,500억달러는 매년 분할 지급이 시행되고 있다.


담당판사도 담배 피해자, 결과 나관

플로리다 흡연자 집단 소송의 담당 판사인 로버트 케이는 양측의 주장을 토대로 담배회사가 물어야할 최종 배상금 규모를 조만간 결정하게 된다. 원고측은 케이 판사 자신이 흡연으로 인한 심장질환을 앓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큰 폭의 삭감은 없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케이 판사는 지난 5년간 줄곧 담배관련 소송을 맡아왔으며 이번 소송 바로 전에도 간접흡연으로 인한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비행기 탑승객들의 집단 소송을 담당했었다. 케이 판사는 당초 배심원 평결이후 일주일 이내에 최종 판결을 내리기로 했으나 담배회사측의 이의제기로 지연되고 있다.

어쨋건 미국의 담배회사들은 잇단 흡연피해 소송 패소로 인해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특히 지난해 1월 빌 클린턴 대통령이 ‘담배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더욱 수세에 몰리고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과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 등 독립운동의 선구자들이 독립전쟁 군자금의 대부분을 조달한 담배 자본가 출신이었다는 점을 상기할때 요즘 담배회사들이 당하는 수난은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박상주 문화일보 국제부기자

입력시간 2000/07/2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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