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이냐? 야당성이냐?" 갈림길에 선 이회창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지난 일요일(7월30일) 제주에서의 2박3일 휴가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재충전이 필요하다”며 측근들이 억지로 등을 떠밀어 나선 휴가였다.

말이 좋아 휴가지, 마음을 풀어놓고 지낼 상황이 아니었다. 권철현 대변인의 표현대로 ‘칩거’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떠나기 전의 정국 상황이 결코 간단치 않았다. 편안한 휴식은 애초 기대할 수 없었다. 국회법 개정안 날치기로 인한 파행의 수습책을 마련해야 했고 장기적인 정국 구상도 필요했다.

이총재는 두 갈래 길을 놓고 고민했을 게 틀림없다. 하나는 상생(相生)의 길이다. 4·13 총선 이후 김대중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가진 뒤 이 총재가 붙들고 있는 중심 화두다. 당내의 상당수 중진이 이를 지지하고 있다.

16대 국회 들어 날치기가 있기 전 간헐적인 여야 대치과정에서 이 총재의 선택은 ‘상생의 정치’라는 큰 틀안에서 이뤄졌다.

국민도 이제는 기존의 이 총재 이미지와 다소 상충되는 듯한 이 단어에 조금씩 익숙해진 상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한 것도 이같은 자신감이 바탕이 됐다.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와의 골프 회동을 제의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유연한 이회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이벤트였다.

측근에 따르면 이 총재는 JP를 적어도 서너 차례는 만날 계획이었다고 한다. 일이 틀어지기 전까지는 ‘열린 마음’이었던 게 틀림없다.

자민련이 교섭단체 구성에 당의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을 잘 아는 이 총재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첫 만남은 그냥 만남으로 끝내더라도 이후 2차, 3차 회동에서 보다 구체적인 ‘당근’을 손에 쥐어주려 했을 수 있다. 돌도 빼내고 잡초도 솎아내는 등 땅을 충분히 고르려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구상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17석의 의석을 가진 자민련의 실체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면 숨통을 터줌으로써 자민련을 끌어당기는 게 낫다고 판단했으리라는 풀이다. 구태여 자민련과 척을 질 까닭이 없었던 것.

그러나 바로 이 JP와의 회동이 이 총재의 발목을 잡았다. 두 사람의 비밀스런 첫 만남은 일찌감치 민주당에 감지됐다.‘자민련 교섭단체 구성 용인’이라는 밀약설이 여권에서 터져나왔고 국회 운영위에서의 날치기로 이어졌다. 이는 일거에 이같은 구상을 무너뜨렸다.

당내 반발은 예상보다 훨씬 거셌다. “시기가 부적절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강경파들은 “상생의 정치 때문에 모든 게 뒤틀어지고 있다”고 쉴새 없이 쏘아댔다. 이 총재로서는 상생의 길로 내디뎠던 걸음을 되돌려야 하는 지경으로까지 몰렸다.

이 때문에 이 총재는 또다른 길을 쳐다보고 있다. 야당성을 되찾는 쪽이다. 명분을 세우고 꼿꼿하게 원칙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당연히 여당과 싸우는 일이 잦아질 수 밖에 없다. 초·재선 등 당내 강경파가 등 뒤에서 지켜보고 서 있다. 날치기로 민심이 여권을 떠났다는 판단도 이 길을 택하도록 이 총재를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그동안 공들여온 상생의 정치는 물거품이 될 수 밖에 없다.

과연 이 총재가 택할 길은 어느 쪽일까.

최성욱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0/08/02 18:45


최성욱 정치부 feel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