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19)] 사천(上)

선진왜성과 찻그릇의 마니아 시마쓰 요시히로

고대로부터 바다에는 전설과 수수께끼가 구석구석 존재하고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오직 물의 세계이나 인간이 거기로 밀고 들어가면 풍향이나 해류의 방향같은 것에 의하여 육지처럼 큰길이 나버린다. 그래서 그 길을 통하여 많은 배들이 이동을 하게 된다.

서부 경남의 남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사천은 뱃길과 항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근대 이전의 항구들은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큰강의 하구에 설치됐다. 항구로 입항하는 배는 사뭇 하구를 거슬러 올라간 곳에 닻을 던졌다.

사천은 임진왜란시 이충무공이 최초로 거북선을 띄워 일본군과 해전을 벌여 대승을 거둔 곳이다. 범선시대가 사라진 후 일제 강점기에 신항구를 만든 곳이 삼천포 항구이다. 비록 연락선은 끊어졌지만 삼천포항은 오늘날 서부경남 사람들의 가슴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21세기 사천은 과거의 뱃길과 항구로서의 기능보다는 하늘길이 열려 서부경남의 항공교통로의 관문역활을 하고 있다. 사천비행장은 멀리는 지리산 자락 일대와 3백리 한려수도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사천비행장에서 삼천포 항구쪽으로 자동차로 20여분 달리면 차창으로 얕은 구릉과 시원한 바다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백정’의 작가 정동주의 집을 지나 우측으로 꼬부라져 500m쯤 가면 용현면 선진성 입구에 자리한 임란당시 전몰한 조명(朝明)연합군 무덤이 나온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수군제독 동일원(董一元)이 일본의 사쓰마도주(島主)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와 가와카미(川上忠實) 등과 치열한 격전을 벌여 조선군과 명나라군이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이다.

다시 북쪽 바닷가 선창쪽으로 올라가면 얕은 구릉지에 고목이 된 벚꽃나무가 수천그루 군락을 이루고 있다. 군데군데에는 자연석을 이용한 축성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곳이 바로 1597년(선조30년)12월 모리(毛利吉城)와 시마쓰 요시히로에 의해 구축된 선진성이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 밤의 선진성은 화사하다 못해 이태백의 ‘춘야도리원서’(春夜桃李園序)를 연상케 한다. 1597년 음력 8월 일본군은 조선의 추수기를 기하여 대규모 군사작전에 돌입하였다.

모리(毛利)가 이끄는 우군 6만4,000명은 양산에 결집, 밀양 창녕 거창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였다. 사천 선진성은 정유재란시 일본군 좌군의 집결지였다. 왜성은 바다로 돌출한 구릉지에 자리잡았고 북쪽 바로 아래는 선착장으로 되어 있어 일본전함들의 집결지로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선진성에서 다시 사천시내로 들어와 고성군 영오방면으로 약10km를 달리다 보면 구암리가 나온다. 구암리는 조선왕조 명종때 이퇴계의 문하로 학문을 날린 바 있는 구계 이정(李楨)을 추모하는 구계서원이 있다.

이곳에서 다시 동쪽 계곡을 따라 2.5km정도 올라가면 송암제라는 큰 저수지가 있으며 이 곳의 좌측 산비탈에 가마터가 있다. 현재 가마자리는 군데군데 파헤쳐져 있으며 주변에는 15세기 초반의 분청사기 도편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종류로는 사발, 매병, 병, 접시 등이며 대나무마디형이 그 특징이다. 대접안과 밖에는 초문, 국화문, 당초문, 여의문, 목단문 등이 상감되어 있다. 유약은 암청색의 조잡한 청자유가 두껍게 시유되고 유약빙렬이 있다.

1598년 임란종전시 남원성에서 퇴각하면서 찻그릇 마니아였던 사쓰마도주 시마쓰는 17성씨 82명의 우리나라 사기장인들을 납치하여 사쓰마로 연행하여 오늘날 불멸의 사쓰마도자기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지금까지 시마쓰가 납치해간 우리나라 사기장인들은 심수관을 위시하여 모두가 남원사람들인 것만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곳 사천 선진성 부근의 가마터에서도 많은 사기장인들이 함께 납치되어갔다는 사실을 이번 기행에서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08/0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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